산업화 시대의 사회적 가치 전환을 요구한 전교조

정도원 2021. 12. 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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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변주곡, 전교조②] 전교조운동 '한국판 6·8 혁명' 아닐까

[정도원 기자]

[이전 기사] 좌경의식화 교사 1호(?)의 고백 http://omn.kr/1wbpf 

그해 2월 경 당시 창간된 지 얼마 안된 국민일보에 ' 교원노조 찬성/반대 칼럼'에 현직교사로서 전국 처음으로 이름을 걸고 교원노조 정당성을 주장하는 글을 써 보냈고, 실렸고, 사정당국에 포착됐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전교협 지도부가 노태우 대통령의 교원노조법안 비토에 이어 임수경, 문익환 목사, 서경환 의원 등 잇따른 평양방문을 먹잇감으로 삼은 공안정국 조성에 상당히 위축되어 있던 참이었으나, 이미 2월 전교협 대의원대회에서 상반기 내 전교조 창립을 의결해놓고 있던 터였다.

나는 1987년 9월 이후 89년 들어서는 거의 매주 토요일 새벽같이 일어나 광주로 서울로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타고 전국단위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이미 교육노동운동에 깊숙히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교육운동에 미쳐(?)있었다. 맡은 직책이 대구교협 노조건설추진위 정책분과장이어서 전교조의 강령과 규약을 심의하고 결성대회를 준비하는 정책기획단위 회의에 대구교협을 대표하여 참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교사는 성직이 아니라 임노동자다, 세상 모든 노동조합은 법외노조(당시는 불법노조라 불리워짐)로 출발한다, 라는 나름의 확신에 이미 도달해있었다.

4월 30일이 마침 일요일이라 수성못 포장마차에서 돌아가신 최영호 선배와 대학동기인 정만준 선생, 셋이서 어묵 안주로 소줏잔을 기울이며 내일부터 이 비열한 노태우 정권의 공안몰이에 단식수업으로 저항하기로 결단하였다. 그날 밤 정 선생과 나는 안방을 차지한 채 정 선생은 내 양심선언의 초안을 만드느라 새벽까지 전동타자기를 두들겨댔고, 나는 그 옆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이튿날인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였다.

직원회의에서, 그간 열흘 정도 불법사찰을 당해왔고 학생들에게 내 동정을 캐묻는 사정당국과 학생들의 전화번호를 경찰에 넘겨준 학교장의 비교육적 처신에 맞서 단식으로 저항하겠다, 고 결의를 밝혔다. 70여 명의 교무실이 한 순간 싸늘한 침묵과 긴장에 휩싸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5일간 나의 단식수업이 시작되었다.

소문을 들은 학생들은 수십 통의 손편지와 대형 도자기 꽃병에 한아름 장미를 꽂아 나를 응원하였다. 본교 교사들과 대구·경북민교협 교수들은 나를 격려하고 단식 저항의 취지에 동조하는 성명서로 응원해 주었다. 나의 단식투쟁 소식을 중앙지와 지역일간지, 지역방송이 대거 보도하였다.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회장이 힘내시라고 응원의 편지를 보내왔다. 학력고사 때 영어대신 나의 독일어 수업을 듣고 독일어를 선택하여 서울사대 독어교육과에 진학한 제자가 모교를 찾아와 서울에서 선생님 기사를 보고 걱정이 돼 울었다고 했다. 나중 들은 소문으론 교사가 아니라 사법고시를 패스해 판사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대구교협 동지들이 4일 동안 200명 가까이나 방문하여 한마음으로 격려와 응원을 해준 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단한 응원이었다. 외롭지 않았다. 단식 나흘만에 남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단식을 중단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학교장이 교내방송을 통해 "학교장으로서 정도원 선생은 좌경의식화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교내방송을 하고나서야 단식을 풀기로 하였다.

학교 뒤 세강병원에서 링거 한 대를 맞고 퇴원하였다. 전교조 결성을 막기 위해 좌경용공단체라는 올가미를 뒤집어 씌우려는 저들의 시도를 내 몸뚱아리를 학대하여 일단 멈추게 한 셈이었다. 홀로 병석에 종일 누워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좀 울적하고 서글펐다.

전교조운동은 한국판 6·8혁명
 
 1989년 전교조해직교사의 법적 지위에 관한 최초의 국회토론회(2018.11.27)
ⓒ 정도원
대구지부 결성식 전날인 6월 10일 토요일 12시 반 경 나를 불법연행·감금하기 위해 남부경찰서, 송현파출소, 달서구청, 달성교육청, 달서우체국, 심지어 서부수도사업소 직원을 포함해 총 13명(하도 어이없는 일이라 일부러 찬찬히 세어보았다.)의 공무원이 동원되었고, 채 귀가하지 않은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찰차에 태워졌다.

아마도 이들은 내가 없으면 대구지부 결성대회가 치러질 수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 나라 관료들이나 수구보수세력들은 걸핏하면 핵심이 누구인지,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를 캐내려는 못된 DNA가 있다. 마치 일제시대 밀정이 독립운동가를 심문하듯이. 웃기는 발상이다. 88년 신학기 초 학교에서 성적 우수생들을 따로 모아 특설반 자습실을 운영하는 것에 저항하여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일 때, 교감이란 사람은 배후세력이 정도원 선생이라 소문을 내었단 얘기를 전해 들은 바 있다.

지난 5월 초 치안본부의 좌경의식화 사건 단식수업 때도 재향군인회 사무실이라면서 단식저항 중인 내게 전화를 걸어와 너의 배후세력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협박하였다. 그들은 단결과 연대의 의미를 모른다. 살면서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남부서 형사들은 한 마디도 내게 배후세력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아마 이들은 내가 대구교협의 핵심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한 명을 납치하려고 13명의 공무원이 동원된 사실을 설명해낼 재간이 없다.

기가 찰 노릇이다. 촌놈 출신인 내가 뭐라고? 노태우, 박철언, 정원식, 서동권, 강민창, 이런 권력자들의 국가운영 수준이 기껏 이 정도인가. 이 한심한 나라의 교육자, 교사인 나는 무엇인가. 내 가르치는 아이들을 제대로 된 민주시민으로 가르쳐 이 야만의 사회를 민주사회로 바꾸어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경북대 사대부고 맞은 편에 위치했던 대구 남부경찰서에는, 자신들의 말에 따르면 나를 담당하는 형사가 서너 명 있었다. 태권도 4단의 서 형사, 유도 4단의 유 형사, 주로 운전대를 잡는 젊은 김 형사가 그들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무도경찰 출신들인 것 같았다. 이 중 젊은 김 형사는 날 존경한다고 했다. 직업이 경찰이라서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말을 두 차례나 했다.

구미 금오호텔 커피숍으로 보신탕 집으로 구미역전의 그 여관으로 다방으로 30시간 동안 불법연행·감금되었다가 이튿날 오후 5시 반 경 풀려났다. 안지랑서 서부정류장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판사의 영장없이 지들 맘대로 납치하다시피 인신을 감금하는 '48시간 임의동행'이란 관행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짓이다. 헌법의 학문, 양심, 즉 사상의 자유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국가보안법처럼. 이런 걸 눈감고 있는 정부는 촛불정부가 아니다.

3년 반동안의 전임상근자로 활동하는 동안 헤아려 보니 꼭 10차례 대구와 서울의 거의 모든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웠다. 십년 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이젠 머리 속에서 희미해졌다. 즉결에 회부되고, 검찰에 폭력혐의로 송치되어 새파랗게 젊은 검사에게 훈계 듣던 일, 최루탄에 무릎을 맞아 화상을 입어 수년 간 새까만 흉터가 남아있던 일, 백골단의 방망이와 전경들 시교육청 직원들과 벌였던 몸싸움에 이르기까지, 말싸움이 아니라 몸싸움이었고 전쟁같은 세월이었다.

해단투 때 서울 양천서에서 불법 연행되어와 구류 중에 수사과장과 말싸움하다 전경들에 의해 대기실에서 유치장으로 들려나가는 내 다리를 잡고 울고불고 소리치며 기어이 나 몸둥아리를 빼앗아내던 해직동지 여선생님들의 아우성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이는 공권력 더 정확히는 국가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내 신체의 자유가 침훼당하고 자존심이 구체적으로 훼손되는 치떨리는 싸움의 현장이었다. 35년 동안 전교조 운동의 체험은 부당한 권력은 물론 정당한 권력의 어떤 부당한 행사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는 내 나름 세상살이의 지식으로 지혜로 남아 있다.

지난 9월 2일 청주지법 재심 선고공판에서 충북 강성호 동지는 원심파기라는 승소판결을 받아냄으로써 30여 년 가슴에 새겨져온 '북침설 교육을 한 빨갱이 교사'라는 붉은 화인을 다행히 걷어내게 되었다. 인사말을 하는 교육민주화동지회 황진도 회장의 음성이 조금 떨리다가 끝내 잠시 멈추었다. (관련 기사 : '빨갱이' 누명 벗은 교사 "담임·교감·교장은 사과하라" http://omn.kr/1v3kp) 

바로 곁에 섰던 나도 따라 울컥했다. 내게는 강 선생의 아픔이 동병상련이었다. 긴 세월 그는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까. 일제가 독립지사를 때려잡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을 본떠서 만든 국보법, 그 국보법이 이 땅에 시퍼렇게 살아 두더지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좀비처럼 이따금 출몰하는 한,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그냥 야만의 사회에 불과하다.
 
 "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 시켜라!" 황진도 교육민주화동지회장 등 3명의 인천교육청 앞 피켓시위.
ⓒ 정도원
전교조는 그냥 노동조합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단결투쟁으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그런 단체는 아니다. 전교조는 처음부터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주창하고 나섰다. 노동자의 권리신장이나 처우개선이 아니라 가르치는 아이들을 입시경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게 해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자는 참교육을 그 무엇보다 앞세운, 이런 노동조합이 우리 역사에 있었던가.

전교조 결성 후 우리사회에는 새로운 말들이 생겨났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삶, 참교육, 인간화, 통일, 환경, 생태, 정보인권, 동아리, 새내기, 모꼬지 등, 모르긴 해도 이런 말들은 이전엔 없었거나 있으되 거의 쓰이지 않았던 아카이브 속 잠자던 말들이었다.

전교조가 우리사회에 불러오거나 회복시켜낸 말들이 아닌가 싶다. 전교조는 우리사회가 그동안 잊었거나 잃어버리고 있었던 말들, 외세의존으로부터 민족을, 파시즘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인권을, 물질문명으로부터 훼손된 자연의 회복을, 효율과 경쟁에 떼밀려 사라져갔던 소중한 가치들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이따금 나는 전교조운동을 프랑스의 6·8혁명에 빗대어 보곤한다. 전교조운동은 4차산업혁명 플랫폼자본주의 시대 우리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판 르네상스'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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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된지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정부는 해직교사들의 명예회복을 문서로 수 차례 약속하였으나 번번히 유산되었다. 31년만에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원상회복법이 국회에 계류 중인채로 20대 대통령 선거를 맞이헀다. 전국적으로 청와대, 교육부, 시도교육청 앞에서 "해직교사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해직교사들의 일인시위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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