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러시아군 정예 10만 병력 국경에 집결한 푸틴, 도대체 뭘 노리기에?
오랫동안 잊히다시피 했던 ‘수퍼파워’ 러시아가 돌아오고 있다. 사실 러시아는 미국과 중국의 G2 체제에서 아무래도 소외되고 관심권 밖으로 멀어진 게 사실이다. 1991년 12월 25일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해체된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지난 30년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옛소련 수퍼 파워 지위 복귀 노려
미‧중 경쟁 틈새 파고들기 총력전
에너지난 속 석유‧천연가스 풍부
세계 2위 군사력 존재감 여전해
가짜뉴스‧선전 등 모든 수단 동원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서방에 충격
러시아 국제사회 발언권 확대 요구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무산 목표
고난의 30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자국의 인권‧민주주의와 우크라이나 등에 대한 개입을 문제삼는 미국‧유럽에 최근 들어 맹렬히 대항하고 있다.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과 그동안 개발‧축적한 하이브리드 전술을 앞세워서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대결로 압축돼 온 글로벌 패권경쟁 구도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해 세력균형의 추를 이동하려고 시도한다.
미‧중 경쟁에 집중하기 위해 전열 정비가 시급한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푸틴을 만났을 때 “핵무기 가진 어퍼볼타(1인당 GDP 792달러로 가난한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옛이름)가 되지 말라”고 충고했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우주로켓까지 갖췄지만 경제력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러시아를 행해 중국편을 들지 말고 실리를 찾으라고 충고한 것이다. 하지만 푸틴은 이 발언을 듣고 행동을 바꾸기는커녕 미국과 서유럽을 상대로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러시아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 글로벌 유가 인상이다. 올해 들어 서유럽에선 바람과 일조량 부족으로 신재생 에너지 생산이 급감하고, 네덜란드 가스전이 지진 유발 문제로 가동을 줄이면서 국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다. 원유는 두바이산을 기준으로 배럴당 가격이 지난 1월 초 49.81달러였던 것이 8월 초 80달러를 넘어섰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11월 23일 전략 비축유 5000만 배럴의 방출을 명령하고, 주요 소비국인 한국‧중국‧일본‧인도‧영국 등도 뒤따르면서 유가는 일시 안정을 되찾아 7일 68.91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연방에너지관리청(EIA)에 따르면 러시아는 세계 최대인 47조8050억㎥의 천연가스 확인매장량을 자랑한다. 2020년 미 중앙정보국(CIA)의 팩트북 기준 1999억㎥의 천연가스를 수출해 세계 1위다. 미국이 1495억㎥, 카타르가 1437㎥, 노르웨이가 1129억㎥, 호주가 1022억㎥로 그 다음을 잇는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러시아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천연가스의 국제가격도 마찬가지로 폭등했다. 미국산을 기준으로 1월 4일 MMBtu(열량 단위)당 2.581달러에서 8월 초 6달러 이상으로 치솟았으며 10월 이후 6달러를 넘나들다 진정돼 7일 3.758달러를 기록했다. 천연가스 매장량과 생산량‧수출량에서 세계 1위인 러시아로선 호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지난 9월 자국에서 나토와 연합군사훈련을 벌였다. 러시아는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항의했고,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레드라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11월 들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 1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배치했고 내년 초에는 그 규모가 17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소련에서 분리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뿌리지만 경쟁 관계다. 20세기 공산 혁명 이후 숱한 피해를 보면서 감정이 악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로 민주화에 성공한 우크라이나 국민이 EU와 나토 가입을 요구하면서 국경을 맞댄 러시아가 불만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2014년 오랫동안 우크라이나가 영유해온 크림반도를 병합했으며, 이로 인해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아왔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인 '돈바스 전쟁'이 계속되다 민스크 협정으로 현재는 휴전 중이다.
이렇게 간신히 평화를 지켜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경에 러시아 대군이 집결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러시아가 40개의 '전장 전술단(BTG)'을 국경에 배치했다고 보도했다. 미 육군의 군사 교리‧훈련을 맡은 육군제병연합센터(USACAC) 산하 해외군사연구실(FMSO)에 따르면 BTG는 자동차화 보병대대나 기갑대대에전투공병·방공·정찰·통신·정보·의무·보급 부대 등을 결합해 육군 작전의 대부분을 독자적으로 구사할 수 있게 편성한 부대다.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오랫동안 혁신을 해왔으며, 새로운 무기체계의 도입과 기존 장비의 현대화‧개량에 주력해왔다. 장비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부대 편성도 현장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재편한 러시아군이 국경에 대거 배치된 것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서방 진영 전체에 불안과 긴장을 높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사실 오랫동안 군사비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지난 4월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의 2020년 군사비 지출이 617억 달러로 세계 4위다. 국내총생산(GDP)의 4%를 넘는다. 미국의 7780억 달러, 중국의 2520억 달러, 인도의 729억 달러보다는 작지만, 영국의 592억 달러, 독일의 528억 달러, 일본의 491억 달러, 한국의 457억 달러보다는 많다.
IISS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육군·해군·항공군과 함께 전략미사일군·공수군까지 5군 체제에 90만 병력을 유지한다. 군사 매체인 글로벌 파이어파워에 따르면 2021년 러시아군은 미군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의 전력으로 평가받는다. 오랫동안 칼을 벼렸으면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러시아가 그런 단계일 수 있다.
여기에 2000년부터 러시아와 국가연합을 유지하는 벨라루스가 국경에서 중동 이주민 밀어내기를 시도했다. 벨라루스에서 국경을 맞댄 EU 국가인 폴란드 등으로 가는 게 합법이라는 가짜 뉴스가 중동에 돌았고, 이어 벨라루스가 대량의 ‘사냥비자’를 발급했으며, 이 나라 국영항공사인 벨에어는 중동 직항편을 늘려 승객을 실어 날랐다. 벨라루스에 도착한 중동 이주민들이 폴란드 국경으로 몰려가 통과를 요구하면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주민‧난민 수용은 서유럽에서 내부 분열을 유발하는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파동은 벨라루스가 서유럽을 압박하기 위해 벌인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평가됐다. 그 배후에 오랫동안 하이브리드 전술을 연구하고 은밀하게 실천해온 러시아가 있다는 것이 합리적인 의심이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비정규전‧사이버전에 더해 가짜뉴스‧선전전‧외교전‧소송전에 외국 선거개입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도구를 동원해 상대에게 타격을 안기고 난처하게 만들어 필요한 것을 얻는 전쟁의 형태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런 압박을 통해 미국과 EU의 경제 제재를 완화하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 강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결국 총 한 방 쏘지 않으면서도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요구를 관철하고 의지를 실현하는 정치 전쟁인 셈이다.
그간 국제사회의 관심이 중국에만 쏠린 것에 불만이 많았던 푸틴으로선 이를 통해 자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려는 계산도 있어 보인다. ‘국제 질서’ 측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과 인정받으려는 의도다.
이는 7일(현지시간) 푸틴과 바이든이 미·러 화상 정상회담을 연 배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지도자가 어떤 대화와 합의를 하더라도 국제사회는 당분간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원과 전력과 경험의 러시아를 오랫동안 방치한 결과다. 미국은 물론 유럽도 이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자원·군사력·패권경험을 두루 갖춘 러시아가 이제 새로운 주연배우의 하나로서 국제사회라는 무대에 등장할 채비를 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미·중 경쟁에 이어 러시아의 굴기라는 만만찮은 과제를 떠안게 됐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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