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가둘 수 없는 진실을 믿는 힘

이마루 2021. 12.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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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로 한 여성이 겪는 수난이 700년 전과 지금, 과연 다른가.

가둘 수 없는 진실을 믿는 힘

영화나 드라마, 책을 감상한 뒤 닮은 작품을 찾거나 서로 연결하는 일을 좋아한다. 인터넷 서점의 ‘이 책을 구매하신 분들이 같이 본 책’이나 영화 ·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페이지에서 이어주는 ‘연관 영화’를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콘텐츠 감상의 역사에서 스스로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이 지도를 만들다 보면 하나도 연결점이 없을 것 같은 콘텐츠들이 서로 닿기도 한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도 그랬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14세기 프랑스 배경의 영화와 디즈니 실사 버전의 〈알라딘〉이 내 안에서 연결되다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라스트 듀얼〉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용맹하지만 고지식한 장(맷 데이먼)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이 집을 비운 어느 날 남편과 악연이 있는 자크(애덤 드라이버)에게 강간을 당한다. 사랑의 열병이 촉발한 충동적인 사건으로 포장한 자크는 이 일에 침묵할 것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용기 내 자신이 당한 일을 고발한다. 사건의 진위를 가릴 증거가 나오지 않자, 장은 왕에게 결투 재판을 요청한다. 이 영화는 14세기에도 거의 사라진 문화였던 결투 재판의 기록을 주인공 세 사람의 관점으로 재구성한다. 1막은 장의 시점, 2막은 자크의 시점, 그리고 3막은 마르그리트의 시점이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이 영화가 〈알라딘〉과 연결된 건 3막이었다. 자기연민과 자의식에 가득 찬 두 남자가 각기 다르게 실제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1막과 2막은 3막에서 제대로 된 의미를 획득한다. 마르그리트의 이야기에서 두 남자의 위선과 망상이 까발려진다. 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롭고 용맹한 기사도,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편도 아니다. 마르그리트가 자신을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고 믿는 자크의 확신은 망상일 뿐이며, 그는 의심할 여지없는 가해자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3막에서 마르그리트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자막을 달아주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각 인물의 시점에서 따로 진실을 뽑아내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진실은 하나며, 방관자이거나 가해자인 남성들의 이야기를 쌓아 올린 이유는 그들의 서사를 한 번에 무너뜨리기 위해서다. 다른 해석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아내를 사지로 몰아넣으면서까지 명예를 회복하고 복수하는 게 더 중요한 남자와, 신과 양심까지도 속이며 범죄행위를 부정한 또 다른 남자의 서사는 결코 침묵하지 않기로 선택한 한 여성의 이야기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침묵하지 않은 결과가 최악의 상황을 불러와도 후회하지 않을 때, 마르그리트가 금방이라도 〈알라딘〉 속 자스민의 ‘Speechless’를 불러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내게 어떤 짓을 해도 난 침묵하지 않을 거야. 너는 날 침묵 속에 가둘 수 없어.”

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여성이 받는 대가는 참혹하다. 진실을 아는 건 이야기 밖의 관객일 뿐, 마르그리트의 일관되고 용기 있는 증언과 상관없이 끝없는 모욕과 의심이 이어진다. 별다른 문제도 없는 발언이나 행실로 꼬투리를 잡히고, 가까운 친구조차 등을 돌린다. ‘비슷한 일을 겪은 많은 여성이 지금까지 침묵해 왔으니 당신 또한 침묵하라’는 요구를 앞선 세대의 여성에게 받는 가운데 심문하고 판결하는 위치에는 남자들만 있다. 피해자인 여성을 전시해서 구경거리로 삼고, 여성을 대리한 남성과 가해자가 진실을 밝히는 결투를 벌이는 상황은 현실 속 성폭력 사건의 은유처럼 보인다. 14세기 이야기라고 하자. 그렇다면 21세기인 지금은? 철저한 고증을 거친 시대극의 외피를 쓰고 역사적인 사건을 그리는 것 같던 〈라스트 듀얼〉은 3막을 통해 시대적 거리감을 완전히 좁힌 뒤 질문한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냐고.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로 한 여성이 겪는 수난이 700년 전과 얼마나 다르냐고.

숨 막히는 결투 30분을 만끽하라는 홍보 문구로 내용을 예상하고 이 영화를 스쳐 지나가는 건 그래서 너무나 아쉽다. 〈라스트 듀얼〉은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이 지나간 이후, 제대로 된 이야기로 성폭력 피해 여성의 입장을 정면으로 다룬 첫 그리고 지금까지는 유일한 대작 영화다. 언제나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복잡한 법이다. 할리우드의 ‘미투’ 선언 흐름을 상당히 불편한 위치에서 지켜본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1막과 2막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을 떠올리면 영화의 메시지와 창작자를 어떻게 연결하거나 분리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긍정적인 부분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화 자체가 희귀하다는 것이다.

〈라스트 듀얼〉이 2021년 최고의 영화는 아닐 수 있지만, 이 영화의 3막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 중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 1·2막을 견뎌야 하는 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이자 의미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윤이나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는 작가. 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랑〉을 썼고, 〈라면: 물 올리러 갑니다〉 외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여성이 만드는 여성의 이야기’의 ‘여성’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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