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1500년 전 백제 타임머신에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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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전인 1971년 7월 5일,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충남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그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당시 송산리고분군(현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배수시설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죠. 15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무령왕릉은 어떤 비밀을 품고 있었을까요. 발굴 50주년을 맞아 무령왕릉의 이모저모를 살펴봤습니다.
」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37.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위치입니다. 그동안 공주 송산리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자, 무령왕이 백제의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포한지 1500년이 되는 올해 9월 정명식을 통해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라고 개칭했죠. 갱위강국은 무령왕이 521년 당시 중국의 최강자 남조 양나라에 보낸 국서를 통해 ‘누파구려 갱위강국(累破句麗 更爲强國·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해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이라고 선언한 것을 일컬어요.
무령왕릉의 주인, 무령왕은 누구
백제는 47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개로왕(제21대)이 전사, 수도 한성(현 서울)도 함락당해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하죠. 이후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무령왕은 동성왕의 뒤를 이어 501년 40세의 나이에 백제 제25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는 귀족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치·경제 제도 정비와 백성 구제에 힘써 나라를 안정시켰죠. 또 가야 지역으로 영토 확장에 나서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잇따라 승리하는 등 백제의 국력을 크게 신장했어요. 무령왕이 이룬 대내외적 성과는 갱위강국 선언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온 사신들을 만난 내용을 담은 그림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가 신라·가야 등 9개 나라를 소국이라 칭하며 백제가 대국임을 과시하고 있죠.
무령왕이 영원히 잠든 무령왕릉에서 약 750m 떨어진 곳에 국립공주박물관이 있어요. 이곳에선 2022년 3월 6일까지 특별전시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를 선보이죠. 두 개 전시실을 연계해 출토유물 5232점 전체를 최초로 한자리에서 공개합니다. 국보를 중심으로 왕·왕비 관련 유물은 상설전시실(웅진백제실), 발굴 과정부터 앞으로의 과제까지 이야기는 기획전시실로 나누어 전시하죠. 박하윤 학생기자와 원예진 학생모델은 전시를 기획한 윤지연 학예연구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무령왕릉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디지털 무령왕릉에서 나온 소중 학생기자단을 반긴 것은 상설전시실 입구에 놓인 작은 은잔이었습니다. “발굴 당시 왕비의 머리 쪽에서 발견된 받침 있는 은잔”이라고 한 윤 학예연구사는 뒤편에 크게 확대해 놓은 용·봉황·인면조 같은 신수를 비롯해 연꽃·사슴·산봉우리 등의 조각을 가리켰어요. “이 은잔에는 잔 몸체뿐 아니라 뚜껑·받침에도 빼곡하게 음각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어요.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와 비슷하게 신선의 세계를 담아내 당시 백제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죠.”
“이 동전은 무령왕이 돌아가신 523년경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입니다. 오수전을 비롯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중국제거나 중국식 물건을 백제에서 만든 게 많아요. 관에는 일본산 금송을 썼고요. 이는 당시 백제가 활발하게 국제교류를 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 뒤에 서있는 건 진묘수라고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진묘수는 중국 후한대부터 나타나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죠. 중국에선 돌·흙·나무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재질로 만들었는데요.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머리의 뿔은 철제고 몸은 석제란 점, 입술을 비롯한 몸 일부를 나쁜 기운을 막는 의미로 붉게 칠한 점 등이 달라요. 생김새도 중국의 것과는 좀 다르죠.”
평범한 돌판으로 보이는 묘지석의 가치
얼핏 귀여워 보이는 진묘수는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으로 국보이기도 한데요. 그 앞에 놓인 돌판 역시 국보입니다. 그냥 받침돌인가 했던 두 사람이 깜짝 놀랐죠. 돌판의 이름은 묘지석(墓誌石).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 및 사망·매장 시점 등이 기록돼 있죠. “무령왕이 먼저 돌아가시고, 왕릉에 모실 때 돌판 2매 앞뒤로 총 4면 중 3면에 왕의 묘지(墓誌), 간지도(干支圖), 매지권(買地券)을 기록한 후 왕비를 추가로 모시면서 매지권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썼어요. 매지권이란 말 그대로 무덤에 쓸 토지를 매입했다는 거죠. 오수전이 땅값을 치른 돈이고요.”
“무령왕릉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이 묘지석이에요. 고대 무덤 중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 무령왕릉이 유일하고, 이외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죠.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 금관이 나와 금관총이라 부르는 식이에요. 묘지석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하게 일치하면서, 삼국사기 내용에 신빙성을 더하기도 했죠. 또 고대 유물·기록을 비교할 때 연대의 기준이 되기도 해요. 실물은 따로 전시돼 앞뒤로 살펴볼 수 있어요.”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에는 묘지석·진묘수를 포함해 12종 17점의 국보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아무래도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일 텐데요. 조명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관꾸미개는 실제로도 금 함량이 높다고 윤 학예연구사가 귀띔했습니다. “관꾸미개는 각각 머리 부분에서 겹쳐진 상태로 발견됐어요. 왕의 관꾸미개는 금이 98.0~99.1%로 거의 순금(24K)에 가깝죠. 왕비의 것도 금 함유량이 99.0~99.2%에 달해요. 각각 금판을 얇게 두드려 편 다음 오려서 무늬를 만들었죠. 불꽃처럼 피어나는 모양인 왕의 관꾸미개는 여기에 달개를 가득 달아 더 화려해요. 천으로 된 모자에 꽂아 장식했죠.”
왕의 것보다 얼핏 수수하게 느껴지지만 지금 당장 착용해도 세련돼 보일 것 같은 금귀걸이·은팔찌·금목걸이 등 왕비의 장신구도 여럿이었죠. 그중 은팔찌는 용무늬로 감싼 안쪽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요. 이를 통해 언제 누가 이 팔찌를 만들었고, 생전에 왕비가 착용했던 걸 무덤에 안장할 때 같이 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굴꾼 피한 천운의 발견, 아쉬웠던 발굴
국보급 유물부터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은·청동 꾸미개까지 샅샅이 유물을 살핀 소중 학생기자단은 잠시 1971년 7월 5일로 시간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송산리고분군 5·6호분은 여름철이 되면 물이 새거나 습기가 차곤 했는데요. 이를 보수하기 위해 6호분 봉토 북쪽으로 파 들어가던 인부의 삽날 끝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습니다. 조심스레 파보니 가지런히 쌓여있는 벽돌이 나왔죠. 1442년 만에 무령왕릉이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 순간입니다.
“당시 학계는 왕릉급 발굴조사를 수행할 역량이 부족했어요. 우리나라에 고고학 관련 학과가 설치된 게 61년이니 10년밖에 안 된 상황이었죠.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 또한 마련되지 않았고요. 당시 학자뿐 아니라 기자·주민 등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널문 개봉작업이 진행됐고, 여기저기 흩어진 유물과 풀뿌리 등 발을 딛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거센 취재 요구 등으로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죠. 현장 통제가 되지 않자 빨리 안전한 박물관으로 옮기기 위해 거의 삽으로 퍼 담은 수준으로 급하게 유물을 수습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후 발굴에 참여했던 분들이 죄책감을 갖고 인터뷰 등에서 계속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죠. 이를 거울삼아 2년 뒤 천마총 발굴 땐 처음부터 철저하게 외부와 격리해 작업했어요.”
“비학문적인 개인 발굴 작업, 유물에 대한 도굴 의심 등 가루베는 많은 비판을 받는데요. 6호분 조사 당시 뒤쪽에 봉분이 있는 건 알았지만 별개의 고분이 아니라 6호분의 현무릉(무덤 뒤쪽에 인위적으로 쌓은 구릉)이라고 판단해 조사하지 않았어요. 이에 다행스럽게도 도굴꾼을 피해 온전한 모습으로 남은 무령왕릉을 우리가 발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발굴조사는 단순히 땅을 파서 유물을 찾고 수습하는 게 아니에요. 유적의 파괴가 전제돼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수단으로서 실험적 방법을 적용하는 거죠. 흙 등을 걷어내고 나면 다신 발굴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파트·도로 등을 건설할 때 유적이 발견되는 경우도 많은데요. 발견된 유적을 발굴하지 않을 순 없어요. 대신 유물 출토 위치, 내부 시설 등 관련한 모든 정보를 기록을 통해 최대한 보존하려는 거죠. 사진뿐 아니라 3D 스캔 등 발달한 기술을 사용해 훼손·손상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유적만 놓고 보면 늦게 발견될수록 좋아요. 과학기술이 훨씬 더 발전하면 땅을 파지 않고도 조사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고, 이전에 발굴된 경우도 과거 밝히지 못했던 사실을 더 알아낼 수 있거든요. 앞으로 첨단 장비를 활용한 과학적 조사와 고고학·역사학·미술사학·보존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령왕릉의 수수께끼 또한 하나하나 풀어나가기를 바랍니다.”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늘 놀라워요.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과정에서 여러모로 부주의했던 점은 안타까웠죠. 이번 취재로 살펴본 무령왕릉에서 나온 백제의 문화유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왕비의 목걸이였어요. 지금의 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우리 선조들의 탁월한 미적 감각과 기술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부러진 숟가락을 테이프로 묶어 고쳐진 모습은 안타까웠죠. 앞으로 우리도 후손에게 물려 줄 많은 문화유산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 보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박하윤(경기도 서원초 4) 학생기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무령왕릉 50주년 특별전을 기획한 학예연구사님과 전시를 둘러보고 인터뷰하고 나니 그동안 제가 알고 있었던 무령왕릉의 모습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제대로 된 발굴을 못한 게 안타까웠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않은 점에는 가슴을 쓸어내렸죠. 현대에도 만들기 어려울 것 같은 정교한 유물들을 당시 직접 만든 우리 조상들의 예술성과 정교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어요. 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옛 완성품에 가깝게 재현한 고고학자들의 섬세하고 정교한 결과물을 통해 현대를 살고 있는 저와 같은 후손들이 생생하게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과거가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며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역사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원예진(서울 광남초 6) 학생모델
」
글=김현정 기자 hyeon7@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박하윤(경기도 서원초 4) 학생기자·원예진(서울 광남초 6) 학생모델, 자료=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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