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겨울이라니.. 이 색이 보이지 않나요? [마음으로 떠나는 그림책 여행]
[이정희 기자]
'색'이 사라지는 계절입니다. 나날이 떨어지는 기온과 건조해지는 공기는 울긋불긋 풍성하던 가을을 하루가 다르게 바사삭 말립니다. 거리엔 낙엽이 쌓이고 '육탈'한 나무들이 또 한 계절을 시작합니다. 다시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시간, 거리의 풍경에 저마다의 '심정'이 얹혀집니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밟는 소리야. 초콜릿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가끔 고약한 똥 냄새도 나.'
▲ 눈을 감고 떠나는 색깔 여행 |
ⓒ 고래 이야기 |
토마스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메네나 코틴이 글을 쓰고 로사나 파리아가 그림을 그린, 2007년 볼로냐 라가치상 뉴 호라이즌 수상작인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 여행>, 검은 색 바탕에 흰 색 글씨가 담겼습니다. 그림책이라기엔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그림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흰 글씨 위에 도톨도톨한 부분은 아래 글밥을 점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점자처럼 왼쪽에 표현된 색깔의 '사물'이 돋을 새김으로 보여집니다.
'색'다른 그림책, 이 책은 노란색을 병아리 솜털로, 빨간 색을 딸기로, 갈색을 나뭇잎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화려한 색감을 통해 드러낸 그 어떤 책보다도 이 책을 보고 나면 색에 생생하게 전율하게 됩니다.
과연 그동안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색들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걸까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보이는' 색이 아니라 '느끼는' 색을 알게 됩니다. '시각'을 잃은 이들이 느끼는 '색', 그런데 그들이 느끼는 '색'을 통해 비로소 '색'이 가진 느낌에 제대로 닿게 됩니다.
▲ 피키크의 색깔 여행 |
ⓒ 미래 아이 |
반면, 야요 작가의 <피키크의 색깔 여행>은 빨주노초파남보 갖가지 색으로 채색된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진 길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마치 크리스마스 시즌이 돼서 반짝이는 전구들로 몸을 두른 나목들처럼, 가지만 남은 나무들의 화려한 행렬이라니요.
그 비밀은 첫 장을 열면 알 수 있습니다. 피키크는 북극에 사는 아이입니다. 집은 이글루, 까마귀 크리와 새하얀 올빼미 부가 친구입니다. 맞아요. 피키크가 사는 곳은 하늘을 빼고는 온통 '하얀' 세상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색'을 잃은 곳이지요.
그런데 피키크가 탐험가가 버리고 간 상자를 발견합니다. 상자 안에는 색연필, 종이, 물감, 붓 그리고 낯선 동물과 나무들의 사진이 실린 책 한 권이 들어 있었어요. 나무조차도 자라기 힘든 온통 하얀 세상에서 사는 피키크는 탐험가가 남긴 책에서 본 것들을 그립니다. 남긴 종이를 다 쓰자 눈이 피키크의 '도화지'가 됩니다.
순록의 뿔을 나뭇가지처럼 앉아있는 현란한 새의 무리, 땅 아래로, 아래로 '숨바꼭질'하듯 풍성한 잎을 뽐내는 나무들, 바나나 나뭇잎으로 만든 카약으로 달을 낚는 신비한 바다 여행, 아니 이젠 홍학, 판다, 오랑우탄, 공작색 등등 머나먼 나라에서 친구들이 피키크를 찾아왔네요.
▲ 색깔 손님 |
ⓒ 한울림 어린이 |
색의 선물을 받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2018년 뉴욕 타임즈와 뉴욕 공립 도서관 베스트 일러스트 어린이 도서상을 받은 안트예 담의 책 <색깔 손님>의 주인공 엘리졔 할머니입니다.
하얗게 세어가는 머리 색으로 인해 노인 세대를 '실버', 혹은 '그레이' 세대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단지 머리 색때문이 아니라 더는 젊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청춘을 상징하는 색에 대비하여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세상이 내린 '규정'만이 아니라, 나이들어 가는 '본인'들 스스로 더는 젊지 않다는 이유로 세상과 자신 사이에 '벽'을 만듭니다.
엘리졔 할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겁이 많은 할머니는 늘 집에만 있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이 그래서일까요? 할머니의 집은 예전 흑백 텔레비젼 속 한 장면 같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집에 파란 종이 비행기가 날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를 찾으러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방해 사절'이라는 팻말이 무색하게 성큼 집안으로 들어온 소년,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함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숨바꼭질을 하고, 동화 책을 읽어가는 동안 두 사람의 동선을 따라 할머니네 집이 '색'을 되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흑백 텔레비젼처럼 어두컴컴한 집인 줄 알았는데 색을 되찾고 보니 '야수파'의 그림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화려한 색감이 가득찬 공간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잼을 발라준 빵까지 먹은 소년은 '할머니 집 되게 좋아요'하고 말하지요. 여러분이 느끼는 나의 공간은 어떤가요? 혹내 마음의 문을 닫아 건 무채색의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고 지내고 있진 않나요?
▲ 피키크의 색깔 여행 |
ⓒ 미래 아이 |
해마다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제 마음도 나뒹굴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좀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보고 낙엽질 것을 지레 한탄하는 대신, 참 아름답게 저무는 생명에 감탄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질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늦은 계절까지 부지런히 피던 나팔꽃이 닥친 추위를 그만견디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제 그 찬서리에 쪼그라든 초라함을 슬퍼하는 대신, 지난 뜨거운 계절 동안 부지런히 피고졌음을 기억하겠노라 전했습니다. 애썼다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말이죠. 그러고 보니,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이 '색을 잃어가는 계절'이 아니라, 피키크의 그림처럼 육탈한 가지 아래 풍성한 다음을 준비하는 또 다른 생명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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