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정, '청순가련형' 외양..내면은 '호탕한 대장부'

2021. 12. 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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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경의 '배우 열전'](4)
'여배우의 품격' 유호정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유호정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겉모습은 청순가련형이지만, 그의 내면은 대범하고 넓기로 입소문이 났다.

술 좋아하는 남편 이재룡과 신동엽의 일화는 유명하다. 밖에서 마신 술이 미진했던지 둘이 신혼집까지 와서 밤새 마시다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온 유호정이 나체로 잠들어 있는 신동엽을 보고 기겁해 안방 문을 닫았다는 스토리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신혼에 그런 일을 만든 남편과 대판 싸웠을 법도 한데, 유호정은 온화한 얼굴로 “건강을 생각해 술을 마시지 말고 차라리 여자 친구를 만나라”고 했다나. 결국 이재룡이 술을 덜 마시게 됐다고. 다시 태어나도 이재룡과 반드시 결혼하겠다는 유호정은 “대신 자신이 이재룡으로 태어나 남편도 한번 당해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웃집 웬수’에서 손현주를 주인공으로 정해놓은 후 상대역으로 여러 배우를 후보로 놓고 고민이 많았다. 캐스팅할 때마다 배역은 임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 본인 의지가 있어야 하고, 스케줄이 맞아야 하고, 또 상대 배우 간 호불호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출연료가 맞아야 한다. 손현주는 이재룡과 대학 선후배 사이고 유호정을 형수로 깍듯이 모셨기에 서로 간 호불호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유호정이 동급 최강이라 할 만큼 몸값이 비쌌다는 것. 시놉시스 전달 후 미팅에 나가기 전 유호정 쪽에서 몸값을 더 부르면 포기해야 한다는 감독의 귀띔이 있었다.

20년여 전 C제과 초콜릿 광고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저렇게 예쁜 사람이 있나 했는데, 미팅에 나온 유호정은 마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예뻤다. “어쩜 관리를 그렇게 잘했냐” 칭찬하자 유호정은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사는 건 참 힘들다”고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뭘 믿고 관리 안 하냐고 악플이 달리고, 관리를 좀 하면 발악을 한다는 악플이 달린다”며 푸념했다. 역할에 대한 질문도 명쾌했다. 덕분에 대화가 잘 풀렸다. “출연료 문제는 아무쪼록 제작사와 잘 상의해달라” 부탁하자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역할을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그 자리에서 출연을 결정해 감독과 나를 감동시켰다. 작가와 감독 앞에서 할 것처럼 해놓고 출연료를 밀고 당기다 무산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날 일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웃집 웬수’ 캐스팅은 신구의 조화가 적절했고 연기파 배우들로 화려했다. 덕분에 팀 분위기도 좋았다.

유호정의 딸로 출연했던 아역 배우는 연습 시간마다 유호정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유호정은 그런 아이를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살갑게, 진짜 자기 아이처럼 대했다. 드라마상 설정으로만 보기에는 영락없는 친모녀 같았다. 아이가 붙임성이 좋은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작가로서 스태프들에게 밥을 사는 자리가 있었는데 정말 팀 분위기가 좋다고 스태프들이 입을 모았다. 배우에 대한 칭찬도 끊이지 않길래 농담 삼아 “누가 제일 인기가 좋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구동성으로 “호정이 누나”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당시 아역 배우 집이 지방이었는데 촬영이 있으면 하루 전날 엄마와 상경해 촬영장 근처나 방송국 근처의 찜질방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를 받기에는 아직 어렸고, 서울에 거주지를 두고 일하기에는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꽃샘추위가 살을 에는 시기였는데 어느 날 내복도 입지 않은 아이가 야외 촬영 중 추위에 떨어 스태프들이 모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유호정이 바로 내복을 사와 아이에게 입혔다고. 그뿐인가. 식사 때마다 아이를 챙겨 함께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첫 연습 때 깡말라 보이던 아이는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는 살이 뽀얗게 오르고 키가 훌쩍 자랐다. 이후 다른 방송사 주말 드라마 ‘사랑해서 남주나’를 할 때 주인공 큰딸 역으로 유호정을 또 캐스팅하게 됐다. 감독이 유호정을 선택했을 때 나는 유호정과 다시 일하게 돼 정말 기뻤다.

잔소리 1등·오지랖 1등,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엄마 ‘홍장미’ 역할로 나온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 中
▶“누가 제일 인기가 좋으냐?”…이구동성 “호정이 누나”

시작은 좋았지만 감독과 대본을 놓고 의견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대본을 보내면 감독은 계속 수정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감독 생각이 옳을 수도 있겠다 싶어 원하는 대로 수정해줬다. 그런데 감독은 수정 대본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졌고 다시 수정을 요구했다. 매번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어느 순간 수정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감독과 사이가 험악해졌다.

감독과 작가가 불통하게 되면 가장 곤란한 사람들이 배우다. 마치 부부싸움에 어느 편도 들지 못하는 자식 같은 입장이 된다. 중견 배우들은 관록으로 중심을 잘 잡아나가지만, 신인 배우들은 그야말로 갈팡질팡하며 감독과 작가 눈치를 보게 된다. 스튜디오 녹화를 할 때 감독은 조정실에 앉아 지시를 하고 스튜디오의 플로어 감독이 이어폰을 끼고 그 지시를 받아 배우에게 전달한다. 감독은 가능하면 토크백을 열어 스튜디오의 배우, 스태프들이 다 듣도록 지시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감독이 토크백을 열고 신인 배우 하나를 그야말로 개망신 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튜디오에 있는 스태프들뿐 아니라 대기실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던 배우들이 모니터로 다 보고 듣고 있는데 세상에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다나. 그 현장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그 신인 배우가 그날의 수모를 극복하고 계속 배우를 할 수 있을까 수군댔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날 “나는 신인 때 연기 못한다고 그만두고 집에 가라는 소리도 수없이 들었다”고 그 배우를 따뜻하게 위로해준 사람이 유호정이었다.

작가가 먹을 욕을 신인 배우가 대신 먹었다는 생각 때문에 나도 괴로웠다. 아마 그 감독은 작가가 써준 대로 촬영하느라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고 그게 다른 쪽으로 분출됐던 것 같다. 방송이 절반이나 남았지만 참다못해 “내가 빠질 테니 감독이 원하는 작가로 교체해주라”고 제작사에 통보했다. 드라마를 쓰는 동안 중도 포기를 결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소식은 금방 퍼졌고 그날 저녁 유호정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작품을 포기하지 말라, 이건 선생님 작품이다”라며 나를 위로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작사와 방송국 국장, CP 등의 중재로 감독이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내가 마지막 회까지 대본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방송은 무사히 끝났다. 영광은 없고 상처만 남았지만, 유호정을 건졌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어린 후배들을 다독이며 최선을 다해준 유호정에게 고마움과 더불어 지금도 마음의 빚을 지니고 있다.

[최현경 한국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6호 (2021.12.01~2021.12.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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