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 노예제도 이겨냈다" 394년만에 英 그늘 벗어난 섬나라
중남미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 바베이도스의 수도 브리지타운. 시계가 정확히 30일(현지시간) 0시를 가리키자 히어로스퀘어(국가영웅광장)에 펄럭이던 로얄스탠더드 깃발(왕실기)이 내려갔다. 이 깃발은 영국 왕실의 구성원임을 뜻하는 표식이다. 그 자리에 대신 새 국기가 게양되자, 하늘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바베이도스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21발의 예포가 발사됐다. 바베이도스가 1627년 영국 식민지가 된 지 394년 만에 공화국으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다.
바베이도스, 가장 새로운 공화국 탄생
이날 영국 BBC 방송과 가디언, 미국 CNN 방송 등은 바베이도스가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공화국으로 탄생했다’고 보도했다. 엘리자베스 2세를 군주로 섬기던 영연방 입헌군주제 국가 바베이도스는 이날 0시를 기해 영국 여왕과 결별하고 인구 28만여명의 공화국으로 새 출발했다. 히어로스퀘어에서 진행된 공화국 전환 행사에서 샌드라 메이슨(72) 총독(영국여왕이 임명한 대리인)이 대법원장 주재 하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찰스 영국 왕세자는 행사 주빈으로 참석해 왕실기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메이슨 초대 대통령은 취임 소감에서 “우린 바베이도스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조국을 지키는 수호자다. 우리가 바베이도스 공화국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면서 “복잡하고 분열된 격동의 세계 속에 이제 우리의 첫 항해를 시작해보자”고 말했다. 메이슨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광장에 모인 수백명이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바베이도스 출신 가수 리한나가 이날 행사에 참석해 국가영웅으로 추대됐다.
찰스 왕세자도 연사로 나섰다. 그는 “이 기념행사에 초대받은 것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낀다”면서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와 우리 역사를 영원히 더럽히는 끔찍한 노예제도로부터 바베이도스 사람들은 비범한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고 치하했다. 이어 “해방·자치·독립이 여러분의 종착점이었고, 자유·정의·자기결정권이 여러분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찰스 왕세자는 이날 메이슨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최고영예인 자유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나는 항상 바베이도스를 친구로 생각할 것”이라며 양국의 지속적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영국에서 “그대 나라의 미래에 행복, 평화, 번영이 깃들기를 염원한다”고 축사했다.
17세기 英 식민지, 400년만에 영국 그늘 벗어나
바베이도스는 17세기 영국의 최초 노예 식민지 중 하나다. 앞서 1563년 포르투갈 항해가인 페드루 캄푸스가 처음 ‘발견’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곳 원주민을 잡아 강제이주시키거나 노예로 팔았다. 영국인이 이곳에 정착해 식민지를 설립한 것은 1627년.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이곳으로 옮겨와 원주민과 함께 담배·사탕수수를 생산하도록 착취했다. 1966년 11월 30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지금껏 영국 여왕을 군주로 섬기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해왔다. 오랜 식민생활로 영국의 흔적이 많이 남아 ‘리틀 잉글랜드’라 불린다.
독립 55년 만에 공화정으로 전환했다는 사실의 상징적 의미는 작지 않지만 외신들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봤다. 공화국 전환 이후에도 영연방 일원으로 계속 남는데다 실질적 수반 역할은 대통령이 아닌 미아 모틀리(55) 현 총리가 이어가기 때문이다. 바베이도스는 의원내각제로, 국가원수의 권한은 대통령 또는 군주가 갖고 행정부 수반의 권한은 총리가 갖는다. 여왕이 원수였을 땐 권한을 총독에 위임했는데 총독을 하던 메이슨이 대통령이 되면서 상징적인 국가원수 자리를 물려받았다. 바베이도스에 사는 다이앤 킹(34)은 로이터통신에 “나처럼 평범한 국민에겐 (공화국 전환이) 무슨 변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외신 "여왕 해임 행보 이어질 가능성"
로이터통신은 바베이도스의 이번 행보로 영국 여왕을 군주로 여기는 다른 국가의 공화국 전환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바베이도스는 1992년 모리셔스가 공화정 전환을 택한 지 약 30년 만에 영국 여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영국 킹스칼리지의 리처드 드레이턴 교수는 “자메이카와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서도 공화국 전환 논의가 있다”면서 “특히 영어를 사용하는 카리브해 국가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잇따를 수 있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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