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 지연에..1월 출발 '메가 FTA' RCEP, 한국은 '첫 차' 못 탄다

박현주 2021. 11. 3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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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효력이 내년 1월 1일부터 발생하지만, 한국은 발효 시기를 놓치게 됐다. 정부가 서명한 지 약 1년 뒤에야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는 등 국내 절차가 지연된 탓이다. 발효가 늦어질수록 관세 혜택을 받는 시기도 그만큼 늦어진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과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서명을 마친 모습. 청와대 사진기자단.


중·일 절차 마칠 동안 뭐했나


RCEP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과 한국ㆍ중국ㆍ일본ㆍ호주ㆍ뉴질랜드 등 비(非)아세안 5개국 간 협정이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참여하는 '메가 FTA'로, 15개국 간 무역·투자 자유화 및 서비스 시장 개방이 골자다.

협정문에 따르면 회원 국 중 9개국(아세안 6개국, 비아세안 3개국)만 국내 절차를 마치고 비준서를 아세안 사무국장에게 기탁하면 그로부터 60일 이후 RCEP의 효력이 발생한다. 지난 2일자로 싱가포르 등 아세안 6개국, 비아세안 국가 중 한국을 제외한 중국ㆍ일본ㆍ호주ㆍ뉴질랜드가 국내 비준을 마쳐 조건을 충족함에 따라 2022년 1월 1일부터 RCEP이 효력을 갖게 됐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가 지난달 1일에야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했다. 비준안 자체가 아직 법안소위원회 단계에 있다. 국회 비준 뒤에도 실제 발효까지는 60일이 더 걸리기 때문에 아무리 서둘러도 내년 1월 말은 돼야 발효가 가능하다.

사실 한국은 이미 RCEP 회원국 중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13개 국가와 양자 간 FTA를 체결했다. 일본과의 '간접적 FTA 혜택'이 RCEP의 핵심이란 뜻이다. 하지만 상대국인 일본은 내년 1월 1일 RCEP '첫 차'를 타고 먼저 출발한다.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 RCE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개요.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산업부 "보완 대책 마련, 번역에 오래 걸려"


청와대는 RCEP 서명 직후 “경제협력 강화, 한국 산업의 고도화 등을 모색해 코로나 극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명했다. 그런데도 ‘정시 출발’이 불가능해진 것은 이례적인 상황이다.

전윤종 산업부 통상교섭실장도 지난 1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법안소위에서 "(RCEP 회원국)15개 나라 중에 저희가 지금 상당히 늦은 편이 됐다"고 시인했다.

RCEP 협상 전반과 국내 절차 등을 맡아온 산업부는 RCEP이 농업 등 국내 산업에 미칠 파장을 분석하고 꼼꼼히 보완 대책을 짜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입장이다. 이런 절차가 지난 9월쯤 끝났기 때문에 10월에야 비준안을 제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산업부 관계자는 "협정문 전체를 번역해 국문본 기준으로 3만 페이지를 국회에 제출했다"며 "다른 비아세안 국가들은 영문 번역이 필요 없거나 일부만 번역했기 때문에 그에 비해 한국이 더 오래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농업계에서 파급효과 등을 우려해 보완대책을 수립하고, 정부 내 예산 협의 과정에도 시일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RCEP은 지난 2019년 12월에 타결됐고, 최종 서명이 지난해 11월 이뤄졌다. 준비 기간이 최소 1년에서 길게는 2년까지 있었다는 뜻이다. 협정문에 나와 있는 발효 조건이 명확한 만큼 다른 회원국들의 진행 상황 등도 면밀히 살폈어야 하는데, 결국 정부가 적기를 놓친 채 이제야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정작 농업 관련 영향 평가가 미흡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8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정부의 영향 평가 결과가 왜곡이나 축소는 아니지만 "계산 가능한 부분에 한해 매우 보수적으로 추정된 수치"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RCEP를 통해 전체 농산물의 63.4%에 해당하는 1029개 품목의 관세를 20년 내에 철폐하기로 하면서 국내 농ㆍ축산물 피해 규모를 20년간 1531억 원으로 추정했는데, 실제 피해는 이보다 클 수 있다는 취지다.
지난해 11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RCEP)의 화상 정상회의 모습. 청와대 사진기자단.


뒤늦은 '속도전', 국회 심사 기능에도 영향


번갯불 콩 볶듯 하는 뒤늦은 속도전에 철저한 심사 의무가 있는 국회도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특히 정부가 비준안을 제출한 지난달 1일은 국회가 가장 분주한 국정감사 기간이라 이를 곧바로 심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또 부속 자료까지 합하면 15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지난 16일 법안소위에서도 결국 이 때문에 법안 처리가 무산됐다. 회의록에 따르면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15만쪽이 되는 협정문을 갖고 와서 불과 30분 토의하고 통과시키는 건 불합리한 부담"이라며 "FTA 비준 동의안을 한 달 만에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은 전례도 없고, 졸속이라는 비판을 들을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데드라인이 임박한 시점에 (비준안을) 무조건 통과시켜야 하는 환경을 만들지 말아달라"(지성호 국민의힘 의원), "제출이 늦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국회와 소통도 없었다"(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전윤종 산업부 통상교섭실장은 "(한국이) 대외적으로 외국에 대한 신뢰관계가 있고 또 RCEP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했을 때 하루가 급한 상황"이라며 신속한 비준을 촉구했다. 이어 "비준 과정은 조속히 마치고, 대책은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게 국익에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외통위는 일단 사안의 시급성을 고려, 12월 1일 RCEP만을 논의하는 '원포인트' 법안소위를 열기로 했다.

산업부는 이와 별도로 다른 회원국들을 상대로 "올해 안에 국회 비준이 완료될 경우 한국도 내년 1월 1일부터 똑같이 RCEP의 혜택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취지로 한국에 대한 예외 인정을 설득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결과적으로 현실화하지 못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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