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내 연인의 두 얼굴
[김아영 기자]
▲ 다 이아리 |
ⓒ 시드앤피드 |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인스타툰 〈다 이아리〉는 누적 120만뷰를 달성할 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고 2019년 책으로 출판되었다. 제목에는 누구나 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아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며느라기〉의 작가 수신지는 "운이 좋아 이런 일을 비껴간 이에게도 작가의 용기가 전해지기를"이라는 추천사를 남겼다.
폭력에 관해 가장 위험한 착각은 특정 사람들만 폭력적이라는 착각이다. 데이트 폭력 또한 그렇다. 원래 난폭하고 욕을 잘하는 사람만 연인에게 폭력적일 거라는 착각은 피해자가 폭력의 징후를 깨닫는 데 중대한 장애로 작용한다.
데이트폭력의 경우, 가해자들은 연인에게만 극도의 폭력성을 내보인다. 이렇다 보니 피해자인 연인이 아니면 가해자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다, 이아리〉에 등장하는 가해자는 이러한 전형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 쉽게 호감을 샀고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이아리가 보기에 '나를 떼고 보면,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이아리 외에는 그의 잔혹한 면모를 아무도 몰랐기에, 제3자들은 쉽게 피해자에게 폭력의 원인을 찾았다. 이러한 반응은 이아리를 고립시켰고, 그녀가 더욱 가해자에게 얽매이는 결과를 낳았다.
심각한 건 가해자조차 이것이 폭력이라는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아리가 경험한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곧바로 폭력성을 드러냈다. 연인이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 자신의 의사와 반한 행동을 했을 때, 가해자는 본인이 공격당했다고 생각했다.
짧은 치마, 브이넥이 깊게 파인 티셔츠, 딱 붙는 원피스, 그런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들이 쳐다본다며 싫어하던 애인의 모습. 익숙한 상황. 그것은 늘 '사랑'이라는 이유로 포장된다.
폭력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데에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연애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많은 남성들은 화끈하고 박력 있는 태도로 여성들의 허리를 휘어감고 입을 맞추었다. 대중가요라고 다르지 않다. 많은 노래들이 마음만 있고 스킨십을 하지 않는 남성을 쉽게 비웃었다. 여자는 기다리고 있는데 넌 왜 바보 같이 머뭇거리느냐는 식이다.
이아리가 연인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는 그녀의 뒷목을 세게 잡고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아리는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로 끌려갔고 그는 골목 끝에 가서야 멈추었다. 그녀의 신발이 벗겨진 것을 본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신발을 찾으러 갔다. 그는 자신의 폭력성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공중화장실에 가는 이아리를 몰래 따라갔다. 그는 좋은 거라면서 그녀를 제압했고 이아리는 수치심과 불쾌함으로 범벅된 채 그곳을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붙잡혔다. 그는 몸을 떠는 그녀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그에겐 이아리가 거부할 수 있다는 당연한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모든 책임은 또 이아리에게 돌렸다. 자신의 행동은 결백한데, 이아리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잘못으로 보일 수 있다는 식이었다.
무서운 점은 가해자의 사과이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자책하고, 눈물을 흘리고, 반성한다 말했다. 이아리가 받아줄 때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직장과 집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아리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그를 용서했다. 그는 '이렇게 해도 얘는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연인이 아닌 타인이었어도, 경찰은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주었을까? 그를 고소했다면, 나는 과연 안전했을까? 아니,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조사를 받고 나오자마자 우리집에 찾아왔었으니까. 분명 내가 피해자인데 조서 쓴 기록이 남을 거라며 윽박지르고 우는 건 그 사람이었다.
이아리는 반복되는 폭력 속에서 '이 모든 게 내 탓인가'라는 생각에 빠졌다. 그녀가 점점 자존감을 상실해가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상상하는 상황에서도 현실적으로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를 보호해줄 방안은 전무했다.
가해자의 논리 속에서 모든 폭력은 사랑으로 정당화 된다.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은 피해자들을 더욱 나약하게 만든다. 제3자들이 데이트폭력을 그저 그런 '사랑싸움'으로 보고 방관하는 것 또한 연인이라는 관계에 갇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때 아동폭력을 가정교육으로 보고 방관했듯 데이트폭력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된다.
데이트폭력의 사연들을 들여다보면 가해자가 폭력을 한 다음에는 정말 잘해준다는 얘기가 흔하게 등장한다. 그러한 태도는 피해자들을 더 노력하게 만든다. 내가 노력하면 상대가 달라질 거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아리가 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트폭력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았던 사람들 덕이었다. 그가 당연하다고 강요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화살과 가해자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법과 체계와 부재. 그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친다. 만약, 운 좋게 그가 나를 놓친다면 그는 반성할까? 다음 피해자는 생기지 않는 걸까? 나를 만났던 이 사람이 가면을 쓰고 당신에게, 당신의 친구에게, 가족에게 다가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피해자가 도망치는 것이, 가해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과연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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