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선과 북한 핵
전쟁이 나면 진실이 먼저 사라진다. 한국의 대선은 어느 전쟁터 못지않은 진실의 무덤이다. 정치적 패배 이상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터에서도 한국이 북한의 핵 위협 하에 살고 있음은 분명한 진실이다. 경제와 문화의 도약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불안한 행복’ 신드롬이 도사리는 이유이다.
4년 전 트럼프와 김정은이 서로의 핵 단추가 더 크다며 협박을 주고받자, 우리 대통령은 제발 전쟁은 피해 달라고 호소했다. 나라의 지도자가 북한과 미국 사이에 휘둘리며 “우리에겐 힘이 없다”고 토로했을 때 국민들은 무력감에 억장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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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내년 한·미 흔들 기회 엿볼 것
새 정부, 안보위기 블랙홀 빠질 위험
올바른 정책과 국론 통일에 달려
대선 때 북핵 토론 통해 의견 모아야
」
북한은 핵이라는 무기, 한국이라는 인질, 중국이라는 뒷배를 조합해서 한국을 비틀어 미국을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근래 한국을 겨냥한 신형 무기의 실험 행렬도 그 일환이다. 미국의 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어느 단계에 가서는 남·북 군사충돌을 촉발시키거나 장거리 핵 미사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핵 보유를 전제로 한 북한의 협상전략을 거부하면서 북핵 문제를 ‘해결’이 아닌 ‘관리’모드에 넣었다. 지난 9월 바이든 대통령은 유엔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진지하고 지속적인 외교를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입장대로 가겠다는 말이다. 미·중 대결로 동아시아의 휘발성은 올라가고 있는데 한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북핵과의 ‘불안한 공존 터널’에 갇혀있다.
역사는 흔히 옷을 갈아입고 다시 등장한다. 내년 5월 새 정부가 취임하면 북한은 한·미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 기회를 노릴 것이다. 야심찬 국정 과제들이 안보위기의 블랙홀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30년의 교훈이다. 한국 스스로가 핵 문제 대응을 주도할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4년 전의 허약한 모습이 재연될 개연성이 높다.
주도 역량의 관건은 ‘올바른 정책’과 ‘국론의 통합’에 달려있다. 정책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고 통합의 길은 좁다. 거론되는 정책들의 줄기부터 살펴보자.
#대북 제재 완화 후 비핵화로 연결시키는 방안 : 제재를 먼저 완화해주되 북한이 비핵화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제재 수위를 더 올리자는 것이다. 협상을 통해 충돌을 방지하면서 관계 개선과 장기적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반대론자는 과거 유사한 시도들이 모두 실패했고, 더욱이 북한이 이미 핵 보유국이 된 상태이므로 북핵 위협 하의 굴종 상태를 고착시킬 뿐이라고 본다.
#미국의 ‘전략적 관리’ 정책에 맞추는 방안 : 미국의 핵우산을 유지하면서 대북 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은 결국 핵을 포기하거나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미·일 공조로 압박하고, 필요시 전술핵 재배치와 핵 공유도 추진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반대론자는 핵 협상의 문이 닫히고 안보의 대미 의존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 중국의 후원으로 북한의 붕괴도 요원하므로, 결국 한국은 북·미 교착의 인질로 살아갈 것이라고 본다.
#한국 자체의 핵 역량을 축적하는 방안 : 미국의 핵우산을 유지하되 ‘무기화되지 않은 핵무기 체계’의 바탕을 만들자는 것이다. 일본이나 독일처럼 미국과의 동맹 하에서도 잠재적 핵 능력 구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라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허용하는 원전용 연료 농축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론자는 핵 확산을 우려하는 미국의 압박을 견딜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 어떤 길을 선택해도 국론이 통합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관련국들이 “너희 정책이 언제까지 갈 것이냐”며 내심 폄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정부가 들어서면 으레 외교안보, 특히 대북 정책의 초당적 추진을 내세운다. 그러나 당파 논쟁의 주요 진원지인 북핵 문제의 ‘초당’은 구호에 그치고 만다. 과거 서독의 통독 정책이 성공한데는 연립내각이라는 정치구조가 작용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현실적인 길은 대통령 선거전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한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치열하면서도 건설적인 토론을 통해 상호수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국민의 이해를 높여야 선거 후 정부가 초당적 정책을 추진할 공간이 생길 수 있다.
바이든은 지난 7월 아프간 철군을 발표하면서 “아프간의 미래는 그들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했다. 한국은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그가 밝힌 ‘자기 운명 결정’의 원칙은 언제나 살아있다. 냉전 후 미국 대외정책의 도드라진 특징은 행정부마다 직전 정부의 결정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최근 ‘핵 선제 불사용’ 논쟁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유럽 안보는 유럽의 손으로’라는 카드를 꺼내는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은 북·미 사이에 휘둘릴 만큼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 단지 힘을 모으지 않을 뿐이다. 북핵에 대응할 ‘한국의 손’을 만들려면 대선을 국론 통합의 경로로 활용해야 한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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