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누가 역사를 독점하려 하는가
역사해석 강요하는 위험한 발상
국정교과서 편찬과 뭐가 다른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 사람은 영국 정치ㆍ역사학자 E H 카(1892∼1982)였다. 1980년대 대학 신입생들의 필독서 중 하나였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 말은 역사를 해석하고 기술하는 행위의 본질에 관한 정곡을 찌른 것이다. 그가 연구 테마로 삼았던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물론 한때 히틀러까지 옹호했던 편력의 소유자란 사실은 훗날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의 언술이 빛을 잃는 건 아니다.
역사는 과거 사실만의 산술적 합산일 수 없다. 현재는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한다. 그런데 현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세상사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인심은 조변석개한다. 바꿔 말해 만고불변의 역사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정 기간 동안만 권력을 위임받는 정부가 특정한 역사 해석을 공권력으로 강제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 역사교과서를 되살리려 했던 것이나 더불어민주당이 역사왜곡 방지법을 추진하는 것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는 한술 더 떠 ‘역사왜곡 단죄법’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혁명정부나 공포정치를 연상케 하는 이름부터가 불온하다.
이재명 후보 본인의 역사관을 유추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최근의 논란 중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관한 발언이 있다. 방한한 미국 상원의원에게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 승인했기 때문”이라며 미국 책임론을 제기했다. 외교적으로 부적절함은 물론 단편적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논리적 비약이다. 미국과 일본이 각각의 권리를 상호 묵인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곧바로 한·일 강제병합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그렇게 따지자면 러일전쟁 때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어 일본의 승전에 일조한 영국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아가 1910년의 병탄을 묵인한 당시의 국제사회 모두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 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제국주의의 절정기였다. 망국의 원인을 자강(自强)에 실패한 ‘내 탓’에서 찾지 않고 ‘남 탓’으로 돌리는 발상이 엿보인다. 그래서는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반면에 1945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에 대해 이 후보는 대단히 자학(自虐)적이다.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의 합작으로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역사단죄법을 만들겠다는 공약의 출발점일 것이다.
필자는 그런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자연인 이재명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적지 않은 숫자의 우리 사회 구성원이 이 후보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자유민주체제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공인(公人) 이재명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권한을 이용해 특정한 진영의 역사관을 강제하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하든 “미군은 해방군”이라고 하든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세력의 역사 해석에 반대하는 입장을 역사왜곡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어떤 목적을 갖고 명명백백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제외하면, 해석과 왜곡의 경계는 모호하고 당대에 재단하기가 어렵다. 만일 어떤 편협한 역사인식이 내면을 벗어나 폭력적 수단으로 외화(外化)하거나 타인의 인권ㆍ명예를 해친다면 얼마든지 기존 법률로 처벌할 수 있다. 그런데도 ‘단죄법’까지 만들겠다는 발상은 역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오만과 다르지 않다.
다시 한번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말이 떠오른다. 2주 전 바로 이 칼럼에서 언급한 말이지만, 그때는 시진핑을 마오쩌둥의 반열에 세우려는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역사결의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오웰의 예언이 바다 건너 중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느새 한국에 도달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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