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거위털 뽑기와 노블레스

조민근 2021. 11. 30.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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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다.”

종합부동산세 ‘폭탄론’에 대한 청와대발 반론이다. 세상에 예고하고 던지는 폭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또 다주택을 정리하라고 양도세 인상 시점까지 늦춰준 만큼 피할 시간도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까지는 납득이 간다. 문제는 팔래야 팔 수 없었던 1가구 1주택자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집값이 이처럼 득달같이 오르고, 결국 종부세 대상이 되리라 예상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깔고 앉아 있는 집이라 값이 올랐다고 팔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7월과 9월, 훌쩍 오른 재산세 고지서를 받아들고는 속이 쓰렸을 것이다. 다시 종부세 고지서를 받게 된 이들에게 청와대 측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측면에서 이해해 달라”고 했다.

「 재산·종부세 급증한 1주택자
“집값 내가 올렸나” 불만 폭발
정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박근혜 정부 ‘거위깃털’ 데자뷔

기획재정부도 1주택자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주 종부세 고지서가 날아든 이후 기재부가 내놓은 각종 보도 참고자료만 5건에 달한다. 하루 1건꼴이다. 요지는 종부세는 다주택자를 겨냥한 ‘정밀 폭격’이며, 1주택자들에 파편이 튀었지만 ‘경미한 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전체 세액) 5조7000억원 중 1주택자의 부담은 2000억원밖에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회룡기자

전체 세액을 기준으로 보면 다주택자에 부담이 집중된 것은 맞다. 하지만 1가구 1주택자의 부담 역시 늘어난 게 사실이다. 대상자는 12만명에서 13만2000명으로, 세액은 1200억원에서 2000억원으로 늘었다. 세액으로 보면 1년 사이 66.6% 증가했다.

여기까지도 이해한다고 치자. 문제는 앞으로다. 집값 급등에 재산세와 종부세를 합한 보유세 부담의 증가 속도는 더 가팔라질 전망이다. 올해 주택 공시가격이 6억원을 넘어서 재산세 부담이 30% 상한까지 오른 가구가 87만여 곳에 달한다. 서울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은 지난달 11억4000만원을 넘어섰다. 역대급으로 뛴 집값은 내년 공시가격에 반영되고, 여기에 과세액을 정하는 공정시장가액 비율도 100%까지 오를 예정이다. 그만큼 많은 1주택자가 고스란히 ‘종부세 사정권’에 들어서게 될 것이란 의미다.

정부는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종부세 개편에 참여했던 한 관료는 “당시 다주택자는 몰라도 1주택자에 대한 부담 강화에는 반대했다”면서 “하지만 위에서 밀어붙여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우려가 나왔지만 여권의 강경 대응 방침에 묵살됐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도 정권 초만 해도 1가구 1주택자는 실수요자로 보고 과도하게 압박하진 않았다. 하지만 집값이 좀처럼 잡히지 않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태도가 바뀌었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를 겨냥한다며 전선을 넓힌 것이다. 하지만 불길은 계속 타올랐고 정부가 규정한 고가 주택도 서울 강남권을 넘어 전역으로 확산했다. 그러다 훌쩍 뛴 세금 고지서에 수도권 민심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자 여권도 아차 싶었을 것이다. 1가구 1주택 종부세 과세 공시가격 기준을 급하게 9억원에서 11억원으로 끌어올린 건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집값을 내가 올렸나” “달랑 집 한 채에 소득은 제자리인데 세금을 이렇게 급하게 올리면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은 끊이지 않는다. 청와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론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데자뷔(기시감)’가 느껴진다는 이들이 많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거위 깃털’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말 소득공제 축소 추진에 반발이 일자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를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결국 소득공제 축소 방침은 철회됐지만, 그렇다고 거위털 뽑기를 멈춘 건 아니었다. 대신 담뱃세 인상, 비과세·감면 축소 등 각종 ‘스텔스 세금’이 확대됐다. 효과는 정권 후반기부터 나타났다. ‘세수 펑크’는 3년 만에 멈췄고, 2016년에는 무려 19조원이 넘는 초과 세수가 발생했다. 그렇게 나라 곳간은 채워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권의 운명은 그때부터 기울었다. 당초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할 것이라던 집권당이 충격적으로 패배한 게 그 시작이었다. 예민한 증세 문제에 공론을 통해 컨센서스를 모아가는 대신 은근슬쩍 밀어붙인 것도 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올해 기재부가 예상하는 초과 세수 규모도 19조원가량이라고 한다. 거위와 노블레스가 주는 묘한 기시감만큼이나 공교롭다.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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