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의사 순국일, 서울역 동상 가봤더니.. 이럴수가
[김종훈 기자]
▲ 강우규 의사 순국일인 11월 29일 서울역광장 모습. 의거 현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 노숙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 동상 바로 쪽엔 노숙인이 자리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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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규 의사 순국일인 11월 29일 서울역광장 모습. 의거 현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 노숙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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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규 의사 순국일인 11월 29일 서울역광장 모습. 의거 현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 노숙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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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강우규 의사의 순국일을 맞아 그의 동상이 세워진 서울역광장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
"왜 남의 얼굴을 찍냐?"
기자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강 의사 동상 주변에 앉아 있던 노숙인 몇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내 사진 찍은 거 아니냐? 왜 찍었어?"
괜한 시비가 붙을까 걱정돼 차분히 답했다.
"오늘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선생의 순국일이다. 그래서 인사 드리려고 온 거다. 선생님들 찍은 것 아니다."
그제야 일행 중 한 노숙인은 "알았다"며 시선을 돌렸다. 소란이 일자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우규 의사 동상은 지난 2011년 9월 의거 92주년을 맞아 그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현장인 서울역 지하철 2번 출구 앞에 설치됐다. 몸체와 받침대를 합친 높이가 4.9m로, 1919년 9월 2일 당시 강 의사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지기 직전의 모습을 표현했다. 강인한 표정의 강 의사 오른손에는 수류탄형 폭탄이 들려 있다.
기자는 두 시간 정도 현장에 머물렀지만, 강 의사에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시민은 전무했다. 이른 아침부터 동상 주변에서 술판을 벌이는 노숙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지만, 머리에 비둘기똥이 그대로 내려앉아 있을 만큼 관리 또한 안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상 및 주변에서 풍겨오는 악취로 인해 애써 강 의사에게 인사를 드리러 오는 시민들이 있어도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지방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을 이용했던 서아무개씨는 <오마이뉴스>에 "볼일이 있어 서울역 온 김에 강우규 의사에게 잠깐 인사하고 가려고 가봤는데 동상 주변에 지린내가 장난 아니였다"면서 "왜 이렇게 관리가 안 되는지 이해가 안 간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위치한 서울역광장은 국유지라 서울시에서 따로 관리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해당 땅을 소유한 코레일 역시 29일 <오마이뉴스>에 "코레일은 서울시와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등을 대상으로 동상을 세울 수 있도록 토지만 무상으로 제공했다"면서 "동상에 대한 관리주체는 코레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보훈처 관계자도 통화에서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현충시설로 등록되지 않았다"면서 "따로 관리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결국 동상은 세워졌지만 특별한 관리하는 주체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전시된 강우규 의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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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사 동상 아래쪽에는 그가 1920년 오늘(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남긴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斷頭臺上/단두대상)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유재춘풍)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유신무국)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豈無感想/기무감상)
예순다섯 노구의 몸으로 의거를 일으킨 강 의사의 회한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시인데, 그는 앞서 일제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때도 아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며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왜 이토록 간절했을까. 강 의사의 호는 '왈우(曰愚)'다.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하고, 고지식하게 말함'을 의미한다. 강 의사는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호대로 일생을 살아왔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강 의사는 1855년 7월 평안남도 덕천에서 가난한 농가의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도 공부에 재능을 보여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했다. 이를 바탕으로 함경남도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강 의사는 어리석고 고지식할 정도로 우직하게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을 한 사람의 민초로서 막을 도리가 없었고 이후에 강 의사 역시 국운이 다함을 느끼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모의한다. 하지만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망해버렸고 이미 쉰 살이 넘은 강 의사는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땅으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농토를 개간하며 한인촌 마을인 '신흥촌' 건설에 힘을 다하고 1917년께는 지린성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전력을 다한다.
1919년 3월, 3.1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강우규는 '노인단'의 핵심 단원 및 간부로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해 동지들과 함께 경성으로 잠입한다. 1919년 9월 강우규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후 강 의사는 사이토의 내한 당일 현재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서 폭탄을 던질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의 나의 65세의 일이다.
불행하게도 그가 던진 폭탄은 사이토 마코토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폭발의 위력이 작지 않아 현장에 있던 총독부 및 경찰 관료 등 30여 명의 인사가 상해를 입었지만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당시 남대문역 광장만 아수라장이 됐다. 강우규는 혼란한 틈을 타 현장에서는 몸을 피했다. 그러나 열흘 뒤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의 감시망에 걸려 체포되고 만다. 친일경찰 김태석은 이 공로로 일제강점기 후반 경시(중소규모 경찰서 서장)까지 오른다.
▲ 강우규 의사가 사형당한 장소. 현재 연못이 자리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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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20년 11월 29일,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이 된 강우규는 서대문 형무소 초기 사형장에서 순국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908년 10월 서대문형무소가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뒤, 연못이 자리한 현재 위치에 교수대 2개가 설치됐다. 이 자리에서 강우규 의사를 비롯해 이완용을 단죄한 이재명 의사, 의병장 이강년, 허위, 이인영 등 7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형을 당했다. 1919년 3.1운동 후 유관순 등 재소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일제는 1921년 옥사를 신축하고 사형장을 새로이 조성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강 의사 의거를 기점으로 1920년대 여러 지사들의 의열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독립을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자긍심이 됐고, 세계만방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과 윤봉길이 각각 1932년 1월과 4월에 일왕 히로히토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시 강 의사가 폭탄을 던진 남대문역은 현재의 서울역이 됐다. 앞서 우리 정부는 강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20년 오늘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강 의사는 순국 후 지금의 은평구 일대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54년께 수유리로 이장됐다. 이후 1967년 지금의 안장 자리인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40번 묘역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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