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이 정답?..'사법의 시간'은 길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업적이 꽤 많은 대통령임에도 IMF 외환위기 때문에 업적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쿠데타의 싹을 도려낸 것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군부 사조직 하나회를 도려냈는데, 이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위험하고 모험적인’ 조치였다. 지난 11월 23일 사망한 故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구속한 것도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조치를 단행했던 이유는, 그가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자이자 의회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는 것은 다른 사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7년 15대 대선을 두 달여 앞둔 시점에서 당시 집권 여당이던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새정치국민회의 故 김대중 후보가 670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의혹 제기 직후 신한국당은 故 김대중 후보를 조세 포탈,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대선 이전에 수사를 종결짓기 어렵다며 수사 유보를 선언했다.
김태정 전 총장 본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을까? 김태정 전 총장은 훗날 故 김영삼 대통령의 수사 중단 지시가 있었음을 밝혔다. 故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선거 때 상대 후보의 약점을 들춰내 비난한 사람 치고 당선된 사람 못 봤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故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을 수사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니 수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故 김 전 대통령의 이런 발언 배경에는, 사법에 의해 정치가 흔들리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결정은 현시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사법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를 위해 의혹을 일단 그냥 놔둬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과 판단에 관한 질문이다.
현재 여당 후보인 이재명 후보를 둘러싸고는 대장동 의혹이, 야당 후보인 윤석열 후보에 대해서는 고발 사주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여야 모두는 특검을 주장한다. 하지만 방향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재명 후보는 화천대유 불법 대출 은폐 의혹도 대장동 특검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윤석열 후보 측은 이는 ‘물타기 특검 주장’이라며 이재명 후보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재명 후보의 대장동 의혹에 대한 입장이 변했다는 점이다. 과거 이재명 후보는 자신이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라며, 대장동 의혹 관련 책임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제는 ‘겸손과 반성 모드’로 변했다. 그러면서 조건 없이 특검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이 후보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이뿐 아니다. 몽골 기병대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선대위를 꾸리고, 민주당을 ‘이재명식 민주당’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
이재명 후보의 언급과 행동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이 필요하다.
첫 번째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재명식 민주당’이라는 단어가 주류 교체를 공식 선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주류 교체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겠지만, 대선 전에 이를 공식화할 경우 당내 주류의 도움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이유가 있을 테다. 자칫 주류 의원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대선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음에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현재 민주당 선대위 그리고 민주당 주류 세력에 대한 이재명 후보의 불만과 불신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재명 후보 측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이 후보 측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서둘러 선대위 직책에서 사퇴해주기를 바란다”는 속내를 내비쳤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주류 측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 같다. 주류 교체 정도가 아니라 총체적 인적 쇄신을 추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인적 쇄신은 기존 민주당 의원의 정치 생명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가만히 앉아서 당할 의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후보는 현시점에서 또 한 번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특검을 받아들이고,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선대위를 비롯한 당을 바꾸겠다는 이재명 후보의 시도들이 성공할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첫째, 정치인의 이미지는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치인 이미지가 단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 변화도 단시간 내에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두 번째, 당 내부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해도, 대선에서 이들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슬림한 조직, 그래서 민첩한 대응이 가능한 조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수 정치인의 경험과 조직 또한 선거 승리를 위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특검을 받아들이기로 한 점은 환영할 만하지만, 시기적으로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이를 국민이 진정성 있는 입장 변화로 받아들일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제라도 특검을 받아들이겠다고 입장을 바꾼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특검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 과거 사례를 보면, 특검을 한다고 모든 의혹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특검이 단시간 내에 수사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설 특검법은 국회에서 특검을 합의하는 방식 외에도 법무장관이 특검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특검을 하든, 특검 구성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대선까지는 100일가량 남았는데, 지금 당장 특검 실시에 여야가 합의한다 해도 특검 준비 기간까지 합쳐 최장 110일이 소요된다. 당연히 정치권이 특검에 합의한다 해도 특검이 대선 전까지 수사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힘들다.
어쨌든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특검에 합의해도 의혹 해소가 가능하지 않아 보이고, 현재 검찰과 경찰의 수사 결과에 만족할 국민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정치권과 권력은 난감할 것이다. 과거 故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대통령이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루자고 했다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법부가 대선에 미칠 영향력을 어느 수준에서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의혹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현재의 정치권이 그런 혜안을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런 상황을 토대로 보면, 아마도 사법에 정치가 끌려다니고, 여론이 사법을 불신하는 상황 속에서 대선이 치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6호 (2021.12.01~2021.12.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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