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도록 평범한 '아주리 군단'의 일상
[이창희 기자]
드디어 도착했다. 5개월 만이었다. 지난 여름을 더욱 더 뜨겁게 만들어준 '유로 2020'의 결승이 끝난 후, 부랴부랴 이탈리아 대표팀 유니폼을 주문했는데, 황금색으로 19번이 새겨진 보누치가 5개월이나 걸려 힘들게 도착했다.
유니폼 덕분에 코로나로 1년이나 연기되었던 유로 2020의 열기가 떠올랐고, 때마침 넷플릭스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다큐멘터리인 <아주리: 웸블리로 가는 길>이 공개되었다(아주리는 '푸른색'의 이탈리아 말이다).
결승전 동점골의 주인공
▲ 장장 5개월이 걸려 보누치를 손에 넣었습니다. 유로2020이 끝나고 우승팀이 결정된 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주문했다. 유니폼 값 만큼의 배송료가 들었고, 결국은 수입 관세까지 지불한 후에야 5개월만에 내 손에 들어왔다. 너무 애틋해서, 입지도 못하겠다! |
ⓒ 이창희 |
다큐멘터리의 만듦새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한 편의 근사한 드라마를 써 내려간 '푸른 유니폼의 아주리'였음에도, 승리 전/후로 끼워 넣어지는 선수들의 회복 훈련과 일상에만 만족해야 했으니까. 놀라운 기량을 보이며 팀을 끌어올렸던 주전 공격수인 스피나촐라의 부상과 수술, 결승전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장면마저 밋밋하게 보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 탈락의 나락에서 끌어올려진 이탈리아 팀을 보는 것은 분명히 반가운 일이었다.
2018년 5월은 이탈리아 대표팀에겐 최악의 시기였다. 60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이탈리아는 러시아 제니트의 감독이었던 '로베르토 만치니'를 데려온다. 만치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대표팀은 2018년 11월부터 유로 우승컵을 들어 올릴 때까지, 34경기 무패행진을 이어간 최고의 팀이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본선 무대를 밟지도 못했던 팀으로써는, 놀라운 성취이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축구는 '빗장수비'로 일컬어지는 단단한 수비를 기반으로 하며 창의적인 공격수의 '결정적인' 득점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팀이었다. 유니폼에 예쁘게 박혀있는 네 개의 별이 증명하듯, 이탈리아의 축구는 전술로 효력을 발휘했으나 러시아 월드컵의 예선 탈락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된 것은 불안한 수비였다. 만치니 감독의 이탈리아가 수비를 강화하면서, 안정감에 기반하여 경기의 속도를 주도한 것이 승리의 중요한 전략이었다.
"다들 챔피언처럼 훈련에 임해주고 있어. 챔피언은 안주하지 않아. 그러니 제안할게,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끝까지 한 번 가보자.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야. 우리가 항상 함께 있어." - 국가대표팀 운영 스태프
"이 순간이 마치 꿈만 같아서요. 지금 우리는 단순한 팀이 아니라, 6천만 이상의 국민을 대표하는 팀이잖아요." - 레오나르도 보누치
다큐멘터리가 비추는 선수단의 일상은 놀랍게 평화롭다. 빡빡하게 진행되는 경기 사이의 긴장감은, 초록의 나무로 둘러싸인 베이스 캠프에서의 회복 훈련을 통해 놀랍게 완화된다. 예선 리그를 거쳐 올라온 본선의 녹아웃 라운드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부담이 클 텐데, 그들은 팀 안에서의 강한 결속력으로 힘든 시기를 견딘다.
유럽에서 코로나를 통한 피해가 가장 큰 나라 중 하나가 이탈리아였으니, 국가대표팀의 놀라운 성취에 대한 국민의 응원과 기대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압박감을 이겨내는 대표팀의 일상도 인상적이었지만, 대표팀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의 응원과 설렘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결국, 이탈리아는 힘겨운 본선을 기적처럼 이루어냈다. 영국은 코로나 유행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의 축구 성지인 웸블리 경기장에 수용 제한인원의 75퍼센트까지 관중을 불러들이며 홈에서의 이점을 극대화하려 했지만, 이탈리아의 우승을 쓸쓸하게 지켜보는 비참한 목격자가 되었을 뿐이다. 이탈리아는 예선부터 지켜낸 놀라운 경기력으로 축제의 승자가 되었다. 놀라운 경기였고, 인상적인 '아주리 군단'의 부활이었다. 나는 곧바로 보누치를 선택하여 유니폼을 주문했다. 그리고 5개월 만에 손에 들어왔다.
인상적이었던 대회의 유니폼을 사는 것은, 언젠가부터 내 작은 취미가 되었다. 현장에 직접 경기를 보러 갔을 때는 경기장의 공식 기념품 상점에 들렀고, 유니폼이든 머플러든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들고 왔다.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후 멈춰버린 세상에서,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는 희망을 남긴 유로 2020 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희망의 상징으로 19번이 새겨진 보누치를 챙겼다. 유니폼 값만큼의 배송비를 지불했고, 5개월을 기다려야 했으며, 수입관세까지 지불해야 했지만 덕분에 그때의 희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암전으로 어두워졌던 화면은 쿠키를 남기며 밝아졌다. '이탈리아 대표팀'이라고 쓰인 표지를 들고 읽어내려가는 문장은 알고 보니, 미국 대통령인 테오도르 루스벨트의 1910년 소르본 대학 연설인 '공화국 시민권 (Citizenship in a Republic)' 중, '경기장의 사람(The man in the Arena)'에서 발췌된 구절이라고 한다.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평범한 영혼들,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인상적인 구절이었다.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아니다) 명예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에게 있다. 얼굴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땀과 피로 덮인 채, 오류와 결점이 없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알고 용감하게 싸우며 계속 실수하는 사람. 자신을 오롯이 바쳐 목표를 이루고, 신이 나서 최선을 다해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 일이 잘 풀릴 때, 마침내 위대한 업적이라는 승리를 경험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노력했음을 알고 넘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평범한 영혼들 사이에, 절대 서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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