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메르켈 시대 온다..가시밭길 유럽통합과 유로화 [국제경제읽기 한상춘]
지난 16년 동안 유럽 통합의 맹주 역할을 담당해 왔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떠났다. 후임에는 좌파 성향의 사민당의 슐츠가 이끄는 3당 연립 정부가 16년 만에 포스트 메르켈 시대를 이끌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통합에는 어떤 변화가 닥칠 것인지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올해는 유럽에서 유난히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인의 관심이 온통 쏠려있는 사이에 유럽연합(EU)에서 첫 탈퇴 회원국이 나왔다. 바로 영국이다. 이유는 회원국들이 난민, 테러, 경기침체 등에 시달리고 있으나 해결책은 고사하고 대응조차 못하는 ‘좀비 EU’ 때문이다. 영국 내부적으로는 정치인을 비롯한 기득권층에 대한 환멸도 가세했다.
최대 관심사는 영국의 탈퇴를 계기로 EU와 세계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경제적으로는 지금 당장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개될 가능성은 적다. 2021년 1월 31일 오후 11시부터 영국이 EU 3대 핵심기구(집행위원회, 유럽 의회, 유럽 이사회)와 산하기구를 떠났지만 관세 동맹은 2021년 말까지 유지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이후 상황이다. 2021년 안에 영국과 EU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되지 못할 경우 ‘노딜 브렉스트’ 가능성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유럽 통합은 단일 세계 경제 현안 중 역사가 가장 길다. ‘하나의 유럽 구상’이 처음 나온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한다면 110년, 이 구상이 구체화된 1957년 로마 조약을 기준으로 한다면 60년이 넘는다.
로마 조약 체결 이후 유럽 통합은 두 가지 길로 추진해 왔다. 하나는 회원국 수를 늘리는 ‘확대’ 단계로 초기 7개국에서 28개국으로 늘어났다가 영국의 탈퇴로 27개국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회원국 간 관계를 끌어올리는 ‘심화’ 단계로 유럽경제통합(EEU)에 이어 유럽정치통합(EPU), 유럽사회통합(ESU)까지 달성해 간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유럽통합 헌법에 대한 유로 회원국의 동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주권 문제로 심화 단계가 가장 먼저 난관에 부딪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절름발이 통합(통화통합+재정 미통합)으로 언젠가는 불거질 것으로 봤던 재정위기가 터졌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영국의 역할을 감안할 때 브렉시트 계기로 확대 단계도 시련이 예상된다. 설상가상으로 유럽 통합의 맹주 역할을 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가장 먼저 유럽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유로랜드 탈퇴 문제를 홍역을 치렀던 ‘PIGS(포르투칼·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가 회원국 탈퇴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EU 탈퇴 이후 영국 경제가 독자적으로 회생할 경우 EU, 유로랜드 모두 회원국의 탈퇴 움직임은 의외로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회원국 내 분리 독립운동도 고개를 들고 있다. 첫 주자는 영국의 스코틀랜드다.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북부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와 근접한 동부 벨트 등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회원국 탈퇴가 잇따르고 분리 독립 운동마저 일어난다면 유럽 통합은 붕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탈퇴와 분리 독립은 쉽지 않은 문제다. 1995년 캐나다 궤백과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투표도 여론조사 결과와 달리 반대가 더 많이 나왔다. 미국도 실리콘 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의 분리 요구가 나온 지 오래됐으나 연방 정부 차원에서 검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영국의 EU 탈퇴를 이례적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첫 회원국 탈퇴’라는 최대 난관에 봉착한 EU는 ‘현 체제 유지(muddling through)’, ‘붕괴(collapse)’, ‘강화(bonds of solidarity)’, ‘질서 회복(resurgence)’ 등 네 가지 시나리오 놓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재정위기, 브렉시트 등으로 노출된 문제를 회원국이 정치적 명분과 경제적 이익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조셉 바이너(J. Viner) 등의 연구에 따르면 유럽처럼 경제발전단계가 비슷한 국가끼리 결합하면 무역창출효과가 무역전환효과보다 커 역내국과 역외국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통합에 가담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앞으로 유럽통합은 회원국의 현실적인 제약요건을 감안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잔존 회원국은 유럽 통합의 차선책, 이를테면 ‘F-EU(France+EU)’ 방안을 빠르게 추진해 나갈 가능성이 높다. ‘F-EU’는 프랑스를 EU에 잔존시키면서 난민, 테러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해결권을 갖는 방식이다. 이때 프랑스는 EU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국의 현안을 풀어갈 수 있어 ’탈퇴(exit)’보다 더 현실적인 방안이다.
‘F-EU’가 선택된다면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이른바 PIGS와 같은 국수주의 움직임이 거센 회원국이 이 방식을 우선적으로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F-EU’에 이어 ‘G-EU(Germany+EU)’까지 적용될 경우 유로랜드에 이어 EU 차원에서도 ‘이원적인 운용체계'가 검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원적인 운용체계는 유로화가 도입위기 이전에 운영됐던 유럽조정메커니즘(ERM)과 같은 원리다. 독일 등과 경제여건이 ‘좋은 회원국’은 경제수렴조건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고, 그리스 등과 같은 ‘나쁜 회원국’은 느슨하게 운영된다. 유로랜드의 기본 골격도 보완될 가능성이 높다. EEU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통화통합과 재정통합이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주무부서로 유럽중앙은행(ECB)과 가칭 ‘유럽재정안정기구(EFSM)’, 상징물로 유로화와 유로 본드 간 ‘이원적 매트릭스' 체제를 갖춰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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