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유진벨 기념관 아래 건물에 이런 역사가

김이삭 2021. 11. 2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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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건물 속 강렬한 메시지, 오방 최흥종 기념관

[김이삭 기자]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풍장터' 양림동에서 한 사내의 믿음이 자라나다

과거 양림동은 전염병에 걸린 시체를 치우는 풍장터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곳으로 여겨졌다. 성경에도 풍장터와 같이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곳이 등장하는데, 바로 '괴로움', '근심'이란 뜻을 가진 아골 골짜기이다.

여호수아서(7장 25~26절)에는 범죄자 아간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는 곳으로 등장하고, 더 나아가서 에스겔서(37장 1절)에는 뼈가 가득할 정도로 황폐한 곳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경 속에 나오는 아골 골짜기가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것처럼, 양림동도 그러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유진벨, 오웬, 우월순과 같은 미국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들어오면서 운명은 뒤바뀐다.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고,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아골 골짜기 같았던 '풍장터' 양림동을 '서양촌'으로 변모시켰고, 소망의 땅(호세아서 2장 15절)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양림동에 자리를 잡았고, 광주에서 최초로 예배를 드렸던 유진벨 선교사는 광주에서 이름을 날렸던 어느 건달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버린다. 그가 바로 광주의 아버지이자 이 글에서 소개할 기념관의 주인공인 오방(五放) 최흥종 선생이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방황하던 건달이 만난 사람

'싸움꾼 최망치', '주먹', 이것은 최흥종 목사가 기독교를 접하기 전까지 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이었다. 최흥종 목사는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전환기를 2번이나 맞이한다. 그는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였으나 유진벨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그가 집전한 첫 예배에 참석하여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

이후 의료 선교사인 포사이드를 만나게 되는데, 길을 가다가 마주한 한센병 환자를 보고서는 쉽사리 도와주지 못했던 최흥종과 달리 포사이드는 거리낌 없이 그 환자를 도와주었다. 이를 본 최흥종은 자신의 인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기 위해 살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1912년 봉선리 땅 1000평을 기증하여 훗날 애양원이 되는 광주 나병원을 설립했고, 계유구락부를 결성하여 빈민구제 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해방 후에도 나환자뿐만 아니라 결핵 환자들,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왔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민족과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

최흥종 목사는 한센병 환자를 비롯한 소외된 이들을 도우며 산 것은 물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앞장서왔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광주 YMCA와 신간회 광주지회를 창립하여 계몽과 여성교육, 민족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경양방죽 매립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1944년에는 전남대 의대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미래 인재 양성에 큰 도움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최흥종이 복음을 등한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북문안교회에서 광주 첫 장로가 된 그는 1921년 북문밖교회를 설립하고, 이후 금정교회와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목사를 역임하며 목회자의 길을 걸어간다.

또한 시베리아에서 2차례에 걸쳐 선교활동을 전개하며 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빈민구제와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온 그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전심을 다해왔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조화로운 빛으로 참되고 영원한 자유를 누리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침략의 야욕을 드러냄과 동시에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1935년,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만다.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최흥종 목사는 반발하여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교회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아울러 자신의 호를 '오방(五放)'으로 정함으로써 세속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난 참된 자유를 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자 모든 것을 멈추고 칩거에 들어간 그는 해방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나, 직책을 오래 수행하지 않았다. 대신 19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에 열중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백범 김구 선생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휘호를 써준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같이 한다는 뜻을 지닌 휘호를 통해 최흥종이 세속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최흥종 목사의 낮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

오방 최흥종 기념관은 양림동 언덕의 유진벨 목사 기념관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유리로 된 출입구와 다르게 겉모습은 붉은 벽돌로 장식하여 투박해 보인다. 더욱이 유진벨 기념관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자리하면서 아래로 내려와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사실 오방 선생은 생전에 높은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을 정도로 자신을 우뚝 세우지 않았다. 그 점을 고려해서 기념관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오방이 유진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을 고려해 유진벨 기념관보다 높거나 동등하게 짓기 보다 낮은 곳에 짓되, 유진벨 기념관 앞에 해당되는 윗층을 잔디 마당으로 조성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
ⓒ 김이삭
오방 최흥종 기념관을 다녀가며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일평생을 낮은 자세로 살며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또한 참된 신앙인으로서 식민지배로 피폐해진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허나 해방 후 지금까지, 양적 성장과 기복신앙에 집착해오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 안위와 만족만을 생각해 온 우리 기독교는 오방을 망각해왔다.

그래서일까, 광주 양림동에 조그맣게나마 최흥종 목사를 기리는 공간이 생긴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념관 하나만 달랑 만들어 놓고서는 오방 목사의 뜻을 기린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지었던 죄악들을 처절하게 회개하고 성찰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는, 그리하여 오방 목사가 보시기에도 부끄러움 한 점 없는 교회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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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isak4703/36)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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