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유진벨 기념관 아래 건물에 이런 역사가
[김이삭 기자]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 김이삭 |
과거 양림동은 전염병에 걸린 시체를 치우는 풍장터라 불리며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곳으로 여겨졌다. 성경에도 풍장터와 같이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곳이 등장하는데, 바로 '괴로움', '근심'이란 뜻을 가진 아골 골짜기이다.
여호수아서(7장 25~26절)에는 범죄자 아간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는 곳으로 등장하고, 더 나아가서 에스겔서(37장 1절)에는 뼈가 가득할 정도로 황폐한 곳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경 속에 나오는 아골 골짜기가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것처럼, 양림동도 그러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유진벨, 오웬, 우월순과 같은 미국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들어오면서 운명은 뒤바뀐다.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고,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아골 골짜기 같았던 '풍장터' 양림동을 '서양촌'으로 변모시켰고, 소망의 땅(호세아서 2장 15절)으로 변화시켰다.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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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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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 최망치', '주먹', 이것은 최흥종 목사가 기독교를 접하기 전까지 그에게 따라붙었던 별명이었다. 최흥종 목사는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전환기를 2번이나 맞이한다. 그는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였으나 유진벨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그가 집전한 첫 예배에 참석하여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
이후 의료 선교사인 포사이드를 만나게 되는데, 길을 가다가 마주한 한센병 환자를 보고서는 쉽사리 도와주지 못했던 최흥종과 달리 포사이드는 거리낌 없이 그 환자를 도와주었다. 이를 본 최흥종은 자신의 인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기 위해 살기로 마음먹는다.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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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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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목사는 한센병 환자를 비롯한 소외된 이들을 도우며 산 것은 물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앞장서왔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광주 YMCA와 신간회 광주지회를 창립하여 계몽과 여성교육, 민족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경양방죽 매립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1944년에는 전남대 의대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미래 인재 양성에 큰 도움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최흥종이 복음을 등한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북문안교회에서 광주 첫 장로가 된 그는 1921년 북문밖교회를 설립하고, 이후 금정교회와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목사를 역임하며 목회자의 길을 걸어간다.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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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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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들어 일제는 침략의 야욕을 드러냄과 동시에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1935년,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만다.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최흥종 목사는 반발하여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교회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아울러 자신의 호를 '오방(五放)'으로 정함으로써 세속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난 참된 자유를 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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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 최흥종 기념관은 양림동 언덕의 유진벨 목사 기념관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유리로 된 출입구와 다르게 겉모습은 붉은 벽돌로 장식하여 투박해 보인다. 더욱이 유진벨 기념관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자리하면서 아래로 내려와 있는 것도 특이하다.
▲ 오방 최흥종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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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 최흥종 목사는 일평생을 낮은 자세로 살며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또한 참된 신앙인으로서 식민지배로 피폐해진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허나 해방 후 지금까지, 양적 성장과 기복신앙에 집착해오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 안위와 만족만을 생각해 온 우리 기독교는 오방을 망각해왔다.
그래서일까, 광주 양림동에 조그맣게나마 최흥종 목사를 기리는 공간이 생긴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념관 하나만 달랑 만들어 놓고서는 오방 목사의 뜻을 기린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지었던 죄악들을 처절하게 회개하고 성찰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는, 그리하여 오방 목사가 보시기에도 부끄러움 한 점 없는 교회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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