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6·25전쟁의 기억과 상흔 딛고 '생의 환희'를 찬미하다
1950년 6월 서양화가 남관(1911∼1990)은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개인전을 했다. 전시 수습으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목도했고 피난 갈 기회를 놓쳤다. 인민군에게 잡힌 그는 인공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역을 해야 했다. 끊어진 한강 다리를 고치는 일에 동원됐고 그때 시체를 무수히 목격했다.
51년 서울이 수복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도중에 종군화가로 참여해 강원도 홍천 도하 작전을 스케치하는 그의 눈앞에는 타죽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쟁과 죽음의 이미지는 그를 지배했고 아이로니컬하게도 동양에서 온 가난한 파리의 화가로서 66년 프랑스 남부 망통비엔날레 대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하는 정신적 유산이 됐다.
‘한국 첫 재불 화가’ ‘추상화의 선구자’ 남관에게는 디아스포라의 피가 흐른다. 그는 일본 프랑스 한국 등 국경을 가로지르며 예술세계를 진척시켰다. 경북 청송 산골 출신인데도 일찌감치 일본 유학을 갔다. 청송에서 보통학교를 다닐 때 일본인 교장의 추천 덕분에 14세(1925년)에 도쿄로 공부하러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중고등 교육을 마치고 31년 도쿄 다이헤이요미술학교(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했다. 35년 졸업 후에도 현지에 남아 동광회(東光會) 국화회(國畵會) 문부성미술전람회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는 학풍의 영향으로 후기인상주의나 입체파 계열의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해 일본에서 경력을 기반으로 개인전을 활발히 열며 중견 작가로 뿌리를 내리던 그가 파리 유학을 결심한 건 창작에 대한 열정과 포부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6·25전쟁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인공 치하에서 벗어난 뒤 부산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피란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52년의 어느 날이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신문을 읽다가 제1회 도쿄국제미술전가 열린다는 소식을 봤다. 그의 내부가 요동쳤다. 전쟁 중임에도 비자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마침내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시절 은사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일본에 갔다. 도쿄국제미술전뿐 아니라 파리에서 온 ‘살롱 드 메’ 전시 등을 봤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더 큰 세계로 나가고 싶은 욕구였다. 53년 3월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파리에 가기로 했다. 현대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55년 2월 남관은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파리의 그는 가난했다. 센강 변에서 관광객용 그림을 그려 팔아가며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당시 프랑스는 추상미술의 황금시대였다. 폴 고갱 등이 거쳐 간 이곳에서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앵포르멜(추상화)의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는 어떤 방법이든 서구인들과는 다른 창조의 세계를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월간중앙, 1971)
파리를 떠나기 전 한국에서 그는 ‘농부 가족’ ‘귀로’ 등 구상 회화를 했다. 전쟁 상황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화면을 구사했지만 형상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파리 정착 이후 화면은 점점 추상화됐다. 앵포르멜 추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흔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해 핏덩어리처럼 끈적거리는 비정형의 화면으로 표현하면서 나타난 미술사조로 해석된다.
남관은 6·25전쟁의 기억과 상흔을 앵포르멜에 포개며 동양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화면에는 폐허의 벽, 황폐한 뜰, 오래된 성이나 유적의 잔해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녹슬고 부식되고 마모된 듯 검붉은 색, 청록색, 군청색 등의 어두운색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고대의 상형문자나 제단, 왕관을 쓴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부유한다. 이런 그의 회화세계를 두고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전쟁의 기억이 옛 유적과 파괴된 고적 등의 사물 형상과 화려한 색채에 의해 되살려지고 있다. 과거의 것을 현존시키고 기억 속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남관은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의 모티브는 자주 전쟁의 기억에서 온다. 벌판에 쓰러진 젊은 병사의 얼굴, 토막 나 뒹구는 팔다리, 시체 위로 쏟아지는 햇볕, 전란으로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모습… 얼굴, 얼굴들을 나는 길 가다가 땅 위에 구르는 이끼 낀 돌 위에서도 보고 고궁의 퇴색한 돌담에서도 본다.”
그 역시 전쟁터에서 본 그 얼굴들을 화폭에 구체화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추상화야말로 역사적 상처를 표출하고 어루만지는 맞춤한 방법이었다. 남관은 작품세계가 인정받아 파리에 온 지 3년 만인 58년부터 ‘살롱 드 메’에 거듭 초대받았고 11년 만인 66년 망통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대상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와 파리시가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그는 머물지 않았다. 육십을 3년 앞둔 6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홍대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장 등 귀국 이후 이력은 그가 한국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작품 세계도 달라진다. 어두침침했던 색상은 밝아졌다. 추상화에서 인간을 의인화하던 기호였던 문자 대신에 춤추는 듯한 인간 이미지가 등장했다. 이 인간 이미지는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인간이 아니라 생의 환희를 찬미하는 유희적 인간이다. 그래서 피에로라고도 불린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하나인 남관의 ‘가을 축제’도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푸른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 등이 화려하게 뿌려지고 데콜라주(붙이는 콜라주의 반대 개념으로 떼어내는 것)된 형상들은 춤을 추는 피에로처럼 동적이고 활기차게 무한 공간을 유영한다. 이 작품은 84년 중앙일보사가 창간 19주년을 맞아 신사옥을 짓고 중앙갤러리(호암갤러리 전신)를 개관하면서 그 기념전으로 마련한 ‘남관 창작 50년’전에 나온 뒤 이건희컬렉션에 소장됐다.
여기서 한국 작가 중 작품값이 가장 비싼 김환기(1913∼1974)를 이야기해야 한다. 김환기와 남관은 절친이다. 두 사람은 부산 피란시절 해군종군기자단으로 함께 일했고 1952년 1월 부산의 다방에서 2인 전을 열었다. 그해 남관이 도쿄로 간 뒤 김환기도 갔고 둘은 도쿄 비엔날레를 함께 봤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한 게 틀림없다. 남관이 파리로 간 이듬해인 56년 김환기도 파리로 건너갔다. 남관이 파리에 정착한 것과 달리 김환기는 3년 만에 귀국했고 나이 50에 다시 뉴욕행을 감행했다. 둘의 행보는 엇갈렸지만 창작 의욕을 불태우는 디아스포라로서 용기는 같다. 그럼에도 ‘추상화의 아버지’라며 김환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비해 남관은 지금 그늘에 가려져 있다. 무엇이 둘의 현재를 가르는 걸까.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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