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릉' 가는 길, 공룡 화석 등뼈에 올라탔다 [해안선 1만리, 두 바퀴 여행]

김병기 2021. 11. 28. 18:1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해안선 1만리 : 동해안편] 문무대왕 수중릉에서 울산 병영성까지

[김병기, 권우성 기자]

 울산 대왕암공원.
ⓒ 권우성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2013년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 할매'들을 취재할 때 들은 말이다. 신한울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고압송전선로에 반대한 싸움은 전쟁터였다. 해발 500미터 고지에 구덩이를 파고 "이곳에서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덕촌할매는 송전탑 건설 자재를 실어 나르는 헬기를 보며 절규하듯 외쳤었다.
         
"저 놈을 때려 뽀샤야 하는데. 저 놈만 보면 내 허파가 뒤집힌다니께!"

문무왕 수중릉에서 해변을 한참 우회한 31번 도로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주변 산 정상과 능선 곳곳에 송전탑이 뿔처럼 솟았다. 산 너머 해변에서 시작된 송전선은 허공을 거미줄처럼 채웠다. 송전탑 건설에 맞서면서 곳곳에서 초병처럼 보초를 섰던 밀양 할매가 생각난 건 월성원전 때문이었다.  
 
 나선천을 따라 니아해변으로 나오니 4기의 거대한 원자로가 해안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 김병기
 
원전을 탓하며 한 고개를 넘자 양남면 웃니마을 논을 가로지른 도로변에 우뚝 선 나무가 보였다. 경주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300년 된 느티나무였다.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고압 송전선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지만, 정자 안에서 바라본 초록 들녘은 액자 속에 담긴 그림 한 폭 같았다. 

나선천을 따라 니아해변으로 나오니 4기의 거대한 원자로가 해안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월성원자력본부 '원전제한구역' 철조망 앞에서 7년 넘게 천막농성을 벌이는 월성원전이주대책위원회 천막도 보였다. 밀양 할매는 밀양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원전 때문에 그깟 고갯길 하나 넘어야 한다고 투덜댔던 내가 갑자기 민망해졌다. 

[주상절리] 2000만 년 전부터 그 자리에 부채꼴 모양으로 누워서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 검은 단면 위로 쪽빛 파도가 던진 흰 포말이 겹쳐지고 있었다. 현무암질의 용암이 흐르고 식으면서 형성된 지형이다. 읍천항을 지나면 나오는 경주 양남 주상절리 전망대. 지금까지 보아온 수직, 사선 형태와는 달리 수평방향으로 형성된 풍경은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주상절리였다. 

2000만 년 전 신생대 때부터 부채 모양을 하고 바다에 누워 하늘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읍천항을 지나면 나오는 경주 양남 주상절리 전망대. 지금까지 보아온 수직, 사선 형태와는 달리 수평방향으로 형성된 풍경은 내가 지금까지 본 최고의 주상절리였다.
ⓒ 김병기
 
 울산 강동화암주상절리.
ⓒ 권우성
 
양남면 하서천을 지나면서 자전거 내비게이션은 31번 도로를 안내했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왼쪽 길로 접어들어 해변을 끼고 페달을 굴렸다. 월성해변을 지나 양남면 수렴리의 해변의 황새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간이전망대 앞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예부터 황새가 자주 찾아 '황새바위'라고 불리며 실루엣이 군함 같아 '군함바위'로도 불립니다. 사진작가들의 일출 명소로 맑은 날 빈번한 출사가 있는 곳으로 지역의 랜드 마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해안에는 이런 풍경이 흔했다. 이름 없는 풍경이 대부분이지만 부지런한 지자체들은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면서 여행자를 유혹했다. 황새바위도 그 중 하나인 듯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텐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 시구처럼.

풍경에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입히면 꽃이 된다. 나와 같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잠시 잡아둔다.     
    
[강동몽돌] 지천으로 깔린 자연의 조각
 
 울산 강동몽돌해변.
ⓒ 권우성
 
 울산 강동몽돌해변.
ⓒ 권우성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수시로 경고음을 냈다. 하지만 기계음만 믿으면 많은 비경을 놓칠 수 있다. 내비게이션은 길만 안내할 뿐 비경을 알려주진 않는다. 지경검문소를 지나기 전에도 그랬다. 31번 도로를 타지 않고 해안쪽으로 난 지경로로 페달을 밟았다. 길지 않은 구간이지만 암석해변을 끼고 달렸다. 절경이었다. 기암괴석 사이를 지나기도 했다.

신명천을 건너면 나오는 검은 해변도 내비게이션에서는 다른 길로 스쳐가는 구간이었다. 해변길로 달리다가 강동몽돌해수욕장을 본 순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 조각가·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가 5m에 이르는 '다비드'상을 조각했을 때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대리석 안에 들어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아냈다."

조각은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곳에 지천으로 깔린 몽돌도 그러했다. 수천만 년 전부터 파도에 쓸리고 씻기면서 모가 난 부분을 갈고 떼어내서 만들어낸 몽돌은 자연의 작은 조각품이었다. 그 넓은 대자연의 조각품 위에 나 혼자뿐이었다. 이런 걸 보려고 여행을 하는 것이다.  

샌들을 벗고 몽돌 위를 걸었다. 부드러웠다. 주먹만 한 돌도 섞여 있었지만, 좁쌀이나 쌀 한 톨, 큰 것은 콩 한 톨 크기였다. 하나같이 비에 젖어 빛이 났다. 수천 년이 지난 뒤에 이곳을 지나는 시간 여행자들은 검은 모래 해변을 걷고 있을 것이다. 한참을 걸었더니 지압효과 때문인지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시원해졌다.   
  
 정자항은 참가자미 최대 집산지이다. 사진은 정자항에서 참가자미를 말리는 모습이다.
ⓒ 김병기
 울산 정자항.
ⓒ 권우성
   
해수욕장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전국 참가자미 최대 집산지인 정자항의 아침 풍경을 보려고 나갔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도로에도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가게 앞에서 사각의 나무틀로 만든 그물 건조대 위에 마름모꼴의 참가자미를 촘촘하게 널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오후 2시 이후에나 배들이 들어옵니다. 새벽에 나가는데 지금 들어오는 배는 없어요."

그렇다고 7~8시간을 이곳에서 죽치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귀신고래'를 형상화한 정자항 남방파제 등대 앞을 어슬렁거리며 평온한 항구의 모습을 영상에 담은 뒤 출발했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강동누리길이라고 적힌 팻말이 나왔다. 지경검문소 쪽의 암석 해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해변을 끼고 달릴 맛이 났다.

[대왕암공원] 거북의 등을 탄 듯, 공룡 화석의 등뼈를 밟는 듯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자전거 내비게이션만 믿으면 많은 걸 놓칠 수 있다. 우가항에서 마을길을 탔다가 길이 끊겨서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수고에는 항상 대가가 따랐다. 강동몽돌 해변에서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걸었지만, 주전몽돌해변길에서는 몽돌 위를 달렸다. 아니, 달리는 기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으로 강원도 고성에서 부산 을숙도를 치면 포항부터는 해변이 아닌 내륙 도로로 안내한다. 일출 명소인 호미곶처럼 대왕암 공원도 그냥 건너뛰는 구간이다. 사실 문무왕 수중릉에서도 하루 밤을 묶으면서 충분히 감상을 했기에 그냥 지나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리도 수십km를 단축할 수 있었다.   
      
 울산 대왕암공원.
ⓒ 권우성
 
 울산 대왕암공원.
ⓒ 권우성
 
울산 대왕암공원에 도착했을 때, 해안길로 달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무왕의 왕비인 자의왕후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건 주차장을 보면서부터였다. 문무왕 수중릉에 비해 규모부터 달랐다. 수천대의 차들이 정차할 수 있는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공원 입구부터 송림이 우거졌다. 곶과 곶 사이를 연결한 출렁다리 위를 사람들이 줄지어 걸었다. 바람에 출렁이고 사람 걸음걸이에 출렁이는 다리 위에서 보면 일산만 앞바다와 도심 숲이 훤히 내다보였다. 길이가 303m, 높이가 무려 42m에 달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산책로는 그 다음부터였다.

대왕암공원 북쪽의 가장 높은 벼랑 바위는 숭어 잡이를 할 때 망루를 세워 망을 보던 '수루방'(수리바위)이다. 청룡 한 마리가 살면서 오가는 뱃길을 어지럽히자 용왕이 큰 돌로 막아버렸다는 용굴(덩덕구리)에서는 쪽빛 물살이 일렁였다. 나무가 하나도 자라지 않는 불모(不毛)의 섬인 '민섬'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이밖에도 탕건암, 자살바위, 처녀봉... 쩍쩍 갈라진 거북 등을 탄 듯, 선사시대 공룡 화석의 등뼈를 밟고 있는 것과 같은 기암괴석 벼랑 산책길이 이어진다. 울기 등대를 지나야 대왕암이 보인다. 기암괴석 사이에 난 철교를 건너 기암괴석 위에 올라타면 깎아지른 절벽 밑에서 일렁이는 파도와 쪽빛 바다, 산책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대왕암 공원은 길어야 30분 정도면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합치면 2시간 넘게 걸린 듯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울산병영성] 도망친 장수... 비운의 역사 산책길

대왕암공원에서 2km정도 달려 방어진항에 도착했다. 강원도쪽 항구들은 대부분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새벽 항구에선 싱싱한 활어와 이를 배에서 내리는 어부들의 잰 손놀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경상남도쪽은 항구는 대부분 큰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서 스카이라인부터 달랐다. 갯향보다는 도심의 향기가 더 짙었다. 

항구에서 나와 태화강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현대 미포 조선소 쪽을 지날 때에는 반가운 라이더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현대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자전거 행렬이었다. 자출이 일상화된 사람들이 떼 지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신기했다. 오래전 네덜란드에 갔을 때 보았던 풍경과 흡사했다. 몸에 짝 붙는 쫄쫄이 복장이 아닌 일상복 차림이었다. 

이들의 뒤를 쫓으며 태화강과 합류하는 동천을 거슬러 올라 울산 병영성에 도착했다. 울산시 중구, 서동, 동동, 남외동 일원에 걸쳐 있는 이 성터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으로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았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9316척, 높이는 12척.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 권우성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 권우성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을 성곽도 도망치는 장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진과 다대포를 점령한 일본의 제1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까지 회자된다. 부산 동래읍성을 겹겹이 포위한 뒤 고니시 유키나가가 송상현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열어라."(戰則戰矣不戰則 假我道)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 장군은 이런 답신을 보냈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열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당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성(李彦誠)과 함께 동래성으로 출전했지만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무너지자 이에 놀라 퇴각했다고 한다. 최전선에 위치한 울산 병영성에도 영남의 13개 고을의 관군이 모였으나 좌병사 이각이 탈출하는 바람에 힘없이 함락됐다. 

400여년 전,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곳은 평화로웠다. 연인들이 함께 걸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도 있었다. 지팡이를 들고 숨을 몰아쉬며 걷는 할머니도 있었다.

"아저씨,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요?"

5~6명의 고등학생들은 성곽 끝에 앉아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굳이 과거 역사를 곱씹지 않아도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타원형으로 쌓은 성곽길을 홀로 걸으면 바람 위에 올라탄 듯하다. 평균 시속 15km의 속도로 달려온 나는 깊은 숨을 들이 마시며 느릿느릿 여행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간 길]
문무대왕 수중릉-경주 양남 주상절리 전망대-강동몽돌해수욕장-정자항-주전몽돌해변-대왕암공원-울산병영성

[인문·경관 길]
양남 부채골 주상절리 :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주상절리군이다. 2012년 9월 25일에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신생대에 이 지역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됐다.

강동몽돌해변 : 울산시 북구의 어물동에서 신명동까지 이어지는 해안가이다. 울산12경 중 하나로 선정됐으며 동해에서 흔하지 않은 몽돌 해변으로 유명하다.

대왕암공원 : 울산광역시 동구 등대로 100에 있는 해변 공원이다. 울기등대와 대왕암, 용굴, 탕건암 등의 기암괴석과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숲이 일품이다.

울산 경상좌도 병영성 : 울산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이다. 태종 17년(1417)에 쌓았다. 사적 제 320호이며, 산책로이기도 하다.

[사진 한 장]
대왕암공원의 기암괴석

[추천, 두 바퀴 길]
주전몽돌해변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