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민주당 연구] 맘모스여당에 맞서 고군분투

김삼웅 2021. 11. 28.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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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여당이 된 민자당과 노태우 정권은 오만에 빠져들었다

[김삼웅 기자]

  사진은 고 김 전 총리(맨 오른쪽)가 민자당 최고위원이였던 1991년 서울 가락동 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자당 창당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왼쪽부터 박태준 최고위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최고위원.
ⓒ 연합뉴스
 
전격적인 3당합당 사태를 맞은 평민당은 이에 맞서는 대응책으로 원내 야당세력과 재야ㆍ학계ㆍ법조계ㆍ여성계가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중도민주세력의 대통합'을 추진했다.

김영삼이 리드하던 민주당에서 노무현ㆍ이기택ㆍ홍사덕ㆍ이철 의원 등 청문회스타들이 민자당 참여를 거부하면서 민주당을 지키고 있었다. 하여 이른바 '꼬마민주당'과 통합을 서둘렀다.    

꼬마민주당은 통합의 조건으로 50대 50의 지분을 요구하고 나왔다. 평민당은 의석 71석의 정당과 의원 7석의 꼬마민주당이 동등지분으로 통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부정적인 자세였다. 

하지만 재야인사들이 야권통합의 산파역을 자임하며 김관석 목사 등이 야권의 통합추진회의를 구성하면서 야권 통합은 급물살을 타게되고, 7월 20일 김대중ㆍ이기택ㆍ김관석이 세 단체의 통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통합에 뜻을 모은 세 단체는 7월 21일 보라매공원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수권야당 건설을 다짐했다. 이날 세 단체는 김대중ㆍ이기택ㆍ김관석이 공동대표를 맞고, 15인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등 몇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꼬마민주당 측의 사전지도체제 및 지구당조직책의 지분비율 등의 조건과 이기택 총재의 지도노선에 제동을 거는 비주류측이 김대중 총재의 2선퇴진 등을 요구하면서 통합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불씨는 살아 남아 있어서 1990년 9월 10일 당대당 합당으로 통합이 성사되었다.

야권이 통합을 앞두고 진통을 거듭하는 동안에 거대 여당이 된 민자당과 노태우 정권은 오만에 빠져들었다. 소수 야당의 의견은 배제되고 숫자를 내세운 여당의 전횡은 날이갈수록 심화되었다. 마침내 노태우 6공의 권위주의 체제가 가동되었다.
▲ 민자당 떠나는 노태우 대통령 1992년 10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은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 민자당의 당적을 떠나겠다는 9.18선언에 따라 당사를 방문, 탈당계를 제출한후 당사를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3당합당으로 여대야소가 된 민자당은 국정운영에 독선과 독주로 일관했다. 7월 14일 국회본회의에서 민자당은 여야간 쟁점이 되어온 국군조직법ㆍ방송법ㆍ광주보상법 등 26개 법안을 30초 만에 날치기로 처리했다. 박준규 국회의장의 사회도 없이 김재광 부의장이 의석중간에서 갑자기 일어나 사회를 보는 기습 날치기였다. (주석 13)

평민당은 거대여당이 된 민자당을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민주주의 실행자인 척하던 노태우는 거대 여당을 뒷심으로 하여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12ㆍ12군부 반란과 5ㆍ17쿠데타 그리고 광주시민 학살의 주범이었다. 세불리하자  6ㆍ29선언을 하고 대선에서 '보통사람'을 내걸었지만, 그의 본령은 민주주의자 아닌 쿠데타의 주역인 것이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90% 이상을 합의에 의해 통과시켰던 법안이 하나같이 날치기와 들치기 방식으로 바뀌고, 민주주의 화신처럼 행동하던 김영삼은 거대여당의 대표로서 옛 모습이 아니었다. 

평민당은 지방자치제 실시를 대여 전략의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당력을 집중하였다. 민주주의의 원천일뿐 아니라 민주시민의 훈련 교실인 지자제는 1948년 제헌헌법(96조와 97조)에 명시되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부분적이지만 실시하였다. 그런데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를 폐기하였다. 통일이 될 때가지 유보한다는 방침이었다.
 
 1990년 7월 당사에 출근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가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과 손을 맞잡은 모습
ⓒ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을 승계한 전두환 정권 역시 지자제 실시를 배척하였다. 시장ㆍ도지사ㆍ군수ㆍ읍장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가 임면함으로써 지방은 중앙의 식민지와 다르지 않았고, 민주주의 본질이 크게 훼손됨은 물론 부정선거와 관리들의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국민은 민주주의 훈련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시장ㆍ도지사ㆍ군수직 한자리라도 할려면 임명권자에게 잘 보이면 될뿐, 지방발전이나 민심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래서 지방은 유신과 5공독재의 기초적 발판이 되었다. 

13대 국회가 개원되면서 평민당을 선두로 다른 야당도 한때는 지자제 실시를 공약하고 입법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3당합당 후에 지자제 문제는 의정현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평민당만이 이 이슈를 줄기차게 제기하였다. 여기에는 김총재의 남다른 의지가 베어 있었다. 

나는 지방자치 실현을 위해, 1963년 이후 의정생활의 전 기간에 걸쳐 싸워왔다. 나에게 별명을 붙인다면 '미스터 지방자치'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이 문제에 몰두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나는 예산심의가 있을 때마다 지방자치를 실시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곤 했다. 때로는 이 문제만으로 몇 시간씩 정부를 추궁한 적도 있었다.

1971년 대선에 입후보했을 때도 나는 지자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1년 이내에 제1단계로써 지방의회, 제2단계로써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400만이었다. 인구가 서울에만 대거 집중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때 공약의 하나로 수도권이 비대해지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행정기구를 과감하게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한다고 했다. 대전을 행정수도로 한다는 안건이었다. 그후 점점 중앙집권이 진행되어 지방자치가 무산된 채 현재 서울은 당시 인구의 두배 이상인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위성도시까지 포함하면 1,400만명에 달할 것이다.

서울 인구가 25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600만 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서울과 지방도시에서는 경제, 문화 등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커졌으며 서울의 팽창은 멈출 수 없었다. 지방자치가 실시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도 일어나는 것이다. (주석 14)

평민당은 1988년 12월 「지방자치에 관한 공청회」를 비롯 소속의원들이 국회 대정부질의를 통해 지자제 실시를 거듭 촉구했다. 소속의원들이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제출하면서 조속한 실시를 요구했으나 거여가 된 정부 여당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였다. 

주석
13> 『동아연감-1991』, 86쪽, 동아일보사, 1991. 
14> 김대중, 앞의 책, 237~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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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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