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마다 '현웃' 터진 에세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의 기사 제안]
[김나라 기자]
"어떡해! 어떡해!"
밥을 볶는데 난데없이 화끈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놀라서 어버버 하는 사이, 불은 또 그런 적 없다는 듯 휙 사라졌다. 다행이다, 할 것도 없이 나는 도마와 칼을 싱크대에 텅텅 던져 넣었다. 평소 같으면 오늘 굉장한 경험을 했다며 즐거워했을 텐데. 밥맛이 싹 도망갔다.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가 문제냐. 스스로 물었다. 몇 년간 별것 아니라고 저리 밀어둔 "어떡해"들이 보였다. '알바를 그만두고 글에 전념해야 전업작가 비슷한 거라도 될 것 같은' 확신, '손가락 빨고 살 거냐!'라며 그에 반박하는 마음의 소리, 끼고 싶은 공모전은 많은데 써지는 건 없고, 그나마 내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건 이미 거장들이 알뜰히 사용했음을 거듭 확인한 허망함, 반복되는 가족 문제의 막막함, 주거환경에서 오는 소음 스트레스 등등.
한 마디로 내 짜증스러움의 정체는, '돈 없고 재능이 어중간하며 정신병을 가진 30대 후반 비혼 퀴어 예술가지망생'이 할 법한 고민의 총체였다. '이반지하여, 당신이라면 작금의 권태와 혼란을 어떻게 헤쳐나가겠는가?' 퀴어 아티스트이자 탁월한 유머리스트 '이반지하'. 마치 아는 사람처럼 그 이름을 떠올렸다.
▲ 에세이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 책은 하나의 글로 다루기에 과하게 많은 '주목 요소'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키워드만 뽑는다면,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크게 들리는 목소리는 '생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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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나는 이반지하를 몰랐다. 그가 2004년부터 공연해 온 전설적 퍼포머라는 것도, 현대미술가, 애니메이션 감독, 시트콤 각본가, 팟캐스트 방송인 등으로 빠지지 않는 재능을 펼쳐온 것도.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책 표지를 본 순간, 사회 비주류만이 뿜어내는 강렬하고도 질긴 에너지를 감지해 버렸다. 발견과 동시에 책을 주문하고, 받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나의 촉은 뛰어났다.
저는 지금 이 사회에서는 패배주의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 이상한 것 같아요. 경쟁에서 뽑히는 사람이 적을수록 떨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거잖아요. 뭐, 그렇게 대단해서 패배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 <월간 이반지하> 10호
그렇게 마침내 나의 집이라는 곳은 작업할 때는 생활의 향기에 돌아버릴 것 같고, 집에서 쉬려고 할 때는 일의 향기에 헛구역질 나는 곳이 되었다. - '부동산과 예술하고저'
'예술하기로 한 죄'로 그의 일상에 화장실 타일의 물때처럼 틈틈이 낀 '존버'의 향기. 이걸 문장으로 맡다 보면 묘한 위안이 찾아온다. 정신승리라고만은 할 수 없는 깊은 통찰 때문이다. 억지 위로나 무한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반지하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그가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선에는 오히려 따뜻함이 도드라진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 '중닭의 아름다움'
자신이 쌓은 벽에 갇힌 자들이여
살면서 신체와 정신을 너무 일체시키면 안 되는 순간들이 오면 그때 그 복도가 생각나곤 한다. 물론 그렇게까지 생각나는 건 아닌데, 안 그러면 지금 글이 안 되니까 그렇게 써 본다. - '독수리 육체 정신'
그 말인즉슨, 억지 휴식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앞에 뭐든 쓰고 '~시대'라고 붙이면 꽤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주제에 시대를 꿰뚫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도래한 시대 도래미'
이게 무슨 아무말인가? 예술가다운 '의식의 흐름' 기법. 당당한 태도에 헛웃음이 나는데 얄밉지가 않다. 오히려 숨통이 확 트인다. 맥락에 얽매이지 않고, 지면의 낭비(?)를 피하지 않으며, 모든 글쓰는 이들이 티내지 않으려 끙끙거릴 고민을 난데없이 그대로 써 버리기도 한다. '어떤 글을 써야 적당히 공감대를 이끌어내면서 통렬하고 시대를 반영하며 그와 동시에 나다움을 뽐낼 수 있을까'('독수리 육체 정신')라고.
왜냐하면 이것은 대단한 장기 기획을 가지고 만들어진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냥 삶이었기 때문이다. - '이반지하의 탄생'
내 인생을 내시경으로 훑은 듯한 일화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재능이 탐났다. 나는 왜 이 소재를 이렇게 써낼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나. 하지만 그의 시선과 문체는 그의 것이고, 나는 앞으로 나의 중닭스러움(또는 병아리다움)을 뽐내면 될 일. 분명 우리는 각각 종이 다른 중닭이다. 다만 이 질문은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굉장히 나 자신'('시, 시, 시작')인 순간을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여기까지 살아낸 자들이여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 생존자거든. - '생존자'
생존자. 감히 내가 써도 될까, 싶은 말을 책이 슥 내밀어주었다. 이런저런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숱한 경쟁과 평가, 차별과 혐오와 자학, 때로는 물리적·정신적·언어적 폭력을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 이반지하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유로 괴상하고 혼란스럽고 통합될 수 없는 인격들'이다.
저는 버티는게 핵심인 것 같습니다. (중략) 우리네 인생은 다 더럽다.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가지고 거기에 깃발 꽂고 이런게 아닌 것 같아요. 이것저것 두드려 보고, 아 이거 아닌가 싶으면 또 접었다가 딴 거 하고, 좀 치사하자. - <월간 이반지하> 2호 (책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
원해서 태어난 적 없는 우리가 이 삶을 산다는 것, 버텨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로가 필요한 활동이라서, 주기적으로 "이야! 우리 여기까지 살아냈다!"하면서 구심점을 잡아주고 축하하는 것이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24절기, 가볍게 짤라서 hit it'
저자는 유튜브 채널 'IBANJIHA'에서 24절기를 기념하는 방송을 한다. "평생 산다고 생각하면 너무 힘드니까 한 달만 살아보자, 일주일만. 하루만. 한 시간만 살아보자"고 한 말에서 시작된 방송이다.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닌데'. 어린애 투정 같아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못한 말을 대신해 주고, 앞서 걸으며 나의 생존을 뒤돌아 확인하는 이 책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 길고 가늘게, 소소하고 재밌게. 이반지하가 권하는 삶의 덕목을 되새기고 나면 마지못해 걷던 걸음이 약간은 달라진다. 이반지하식으로 말하자면, '신명 리틀빗(little bit)'.
뭘 하든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마음대로 사시면 돼요. - <월간 이반지하>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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