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선풍기 만든 손, 이제는 시골 맥가이버로 삽니다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군 청산면 의지리 의동마을 전인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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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잘 다루는 법
전인철씨는 의동마을 '맥가이버'로 통한다. 웬만한 기계 수리는 그의 손에서 해결된다. 자그마한 톱에서부터 예초기, 경운기, 오토바이까지 고장 난 부분을 찾아내 뚝딱뚝딱 고친다. 수리비용은 따로 받지 않는다. 필요한 부품이 없을 때면, 그가 직접 면 소재지에 나가 구해와 부품값만 받는 정도.
의동마을 양성영(82)씨는 그가 "신문에 나올 법도 한데 안 나왔다"며 귀띔했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에 전인철씨는 "내가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기계를 잘 다루는 비결'은 간단하다. '설계자의 뜻에 맞게 기계를 만지는 것'이다.
▲ 웬만한 기계 수리는 그의 손에서 해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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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만한 기계 수리는 그의 손에서 해결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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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이 금성사였어. 진해화학서 7년, 카프로에서 30년 가까이 있었지. 금성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풍기를 만든 회사인데 그때 회사에서 처음 선풍기 완성하고 나서 다들 뿌듯해했던 기억이 나."
공학 서적을 구해 공부하며 밤낮없이 기술을 익히고 일해온 젊은 날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지난 삶은 한국 산업 발달사와도 맞닿아 있었다.
선풍기, 화학비료, 나일론 양말
평생 기계를 다뤄왔지만, 전인철씨는 본래 이북에서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칠 때까지 인문계 공부를 했다. 그런 그가 6·25전쟁을 거치고 남한에 왔을 때, 기술을 배운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금성사에서 국내 최초로 선풍기를 만들고 진해화학에서 화학비료, ㈜카프로에서 나일론 소재를 생산하기까지 그의 삶은 한국 산업 발자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참 어렵던 시절, 먹을 것이 참 귀했어. 농사를 지으려면 비료가 있어야 하는데,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쓰는 화학비료는 대부분 수입 비료였거든. 내가 일했던 진해 화학은 국내에서 비료를 만들어 자급자족하자, 하면서 생긴 커다란 화학비료 공장이었지."
▲ 과거 일하던 시절 전인철씨 모습 |
ⓒ 월간 옥이네 |
▲ 과거 일하던 시절 전인철씨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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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나일론 양말을 처음 접했을 때, 다들 놀랐어. 이전에는 양말에 구멍이 금방 나서 매번 꼬매고, 기워 신곤 했는데 나일론 양말은 그런 일이 거의 없잖아.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옷을 만들자 했던 거야. 석유에서 나일론 뽑아내는 기술을 익혀서 엔지니어로 카프로에 들어갔지. 말단 직원으로 회사에 들어가서, 초창기 3년 동안은 거의 공장에서 살다시피 했어.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직원이 별로 없어서 책임감이 막중했지."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은 질기고 가벼운 데다 저렴해 초창기 획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나이롱 환자'와 같은 단어가 남아있을 정도니, 당시 나일론이 얼마나 화제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가족도 잊어버리고 열심히 일했다"고 말한다. 안전문제에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 전인철 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방독마스크' 외 특별한 안전장비 없이 화학물질에 노출됐다.
"나일론을 뽑아내려면 아무래도 화학물질을 많이 만져야 해. 황산, 질산, 개미산을 취급하는데 여기에서 인체에 해로운 화학 가스가 나오거든."
말단 직원으로 들어간 공장, 열악한 환경에서 성실히 일한 끝에 그는 국가 표창장을 수여 받고 과장 직급에 올랐다. 그간의 노고를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는 55세 정년 이후에도 회사에 남아줄 것을 청탁받아 7년간 더 근무한 끝에 퇴직했다. 화려한 퇴장이었다.
'지금'에 충실한 삶
그간의 세월은 그의 몸에 흔적을 남겼다. 퇴임 후, 기침이 심해 병원에 찾아갔을 때 그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는 국립암센터에서 한쪽 폐 2/3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폐암 2기에서 3기로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같으면 산재처리를 하겠지만,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 그렇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야. 그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지."
청산 의지리를 찾은 것은, 수술 이후의 일이다. 요양을 위해 최대한 공기 좋은 곳을 알아보던 중 이곳이 눈에 띄었다. '청산', 지명부터 마음에 들었다. 어떠한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에게 고향은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이야. 어디 있을 때든 그랬어. 정 붙이고 사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이지 않겠어?"
▲ 전인철씨 집 앞마당. 비행기 모양의 풍향기가 시원스레 서 있다. 자유롭게 하늘 위를, 쉼없이 모터를 움직여 날아가는 비행기는 전인철씨를 닮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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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꾸준히 일기를 썼어. 매일, 조금씩이라도 기록을 남겨놓자 하는 마음으로. 자기 겉모습은 거울로 볼 수 있어도 마음은 못 비춰보는데, 일기를 쓰는 건 내 마음을 비춰보는 일이잖아. 가끔 옛일을 들여다보면 그립기도 하지만 그건 과거로 도망가려는 일인 것 같아. 사람은 자꾸 앞으로 나아가야지, 뒤돌아 보면 안돼."
그의 삶의 철학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전인철씨에게 청산면 의지리 의동마을은 이제 고향이다. 요즘 그의 행복은 집 마당에 모여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여기가 마을 사랑방이야. 지나다 눈 마주치면 인사하고, 서로 안부도 묻고 잠깐 이야기 나누다 가고 그러지. 마을에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어울려 살아가니, 더 바랄 것이 없어."
그의 곁에 놓인 스마트폰이 눈에 띄었다. 평생 기계를 만지며 살아온 그에게도 스마트폰은 쉽지 않지만, 전인철씨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설명서를 보면서 사용법을 익힌다.
"금성사에서 일할 때, 컴퓨터 6대 가져다 놓고 '배울 사람은 배우라' 했었어. 그때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죄다 영어로 쓰여 있는 거야. 그때라도 영어를 배웠어야 하는 건데. 이제 와 배우려 하니까 영어는 도저히 머리에 안 들어가(웃음)."
월간옥이네 통권 53호(2021년 11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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