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다발 들여와 직원 월급 줬다"..'극한직업' 평양 주재 외교관

정영교 2021. 11. 2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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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재 러시아 외교관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경이 봉쇄되자 귀국길에 직접 수레를 밀며 국경을 건너는 모습. [연합뉴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사절단 모임이 열린 2011년 9월 11일. 발레리 수키닌 당시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는 평양에서 은행 거래가 되지 않아 모스크바와 베이징에서 현금 자루를 실어왔다고 하소연했다. 대사관 운영비와 직원들 월급을 지급해야 하는데 서방 은행들이 북한과 거래를 허가해주지 않아서였다. 국제사회의 촘촘한 대북제재 앞에 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인들 별 수 없단 얘기다.

코로나19 대유행 이전까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북한에서도 30여개 국가와 국제기관들이 재외공관을 운영해 왔다. 일반적으로 외교관과 국제기관의 요원들은 주재국에서 일반 외국인과 달리 국제법과 국제관습상 인정된 특권적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만 북한의 특수함은 이런 '특권'을 허용치 않는다.

22일(현지시간) 포린폴리시(FP)는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의 내부 문건을 입수해 '북한에 있는 외교관들의 삶(The Life of Diplomats in North Korea)'이란 제목으로 평양 문수동에 주로 모여 사는 외교관·전문가·구호요원 등의 북한 경험을 전했다.


외교사절도 北당국 감시·통제 받아


북한 주재 외교사절이 지난 7월 6·25전쟁 정전협정체결일(7월27일)을 앞두고 평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참관하는 모습. [노동신문=뉴스1]
이들은 하나같이 북한에서 겪은 통제와 감시에 대해 언급했다. 평양에 주재했던 대사관 외교사절과 국제기구 요원들은 북한 당국이 자국 외교관·정부 관리들과의 교류나 북한 내 여행을 통제했다고 전했다. 특히 북한의 정치나 핵 관련 활동에 관한 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수집하기 어려웠다.

모니터링이 필수인 인도지원 사업의 경우에도 현장 방문을 위해서는 당국의 허가와 안내원 동반이 필요했기 때문에 구호요원들은 현지인들과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를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영국 외교관의 아내로 2017년부터 2년 동안 평양에 거주했던 린지 밀러는 미국의소리(VOA)와 인터뷰에서 "북한에 살면서 늘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른 나라에서는 늘 새로운 사람과 교류를 통해 그 나라를 이해하고 문화를 배울 수 있었지만, 북한에서는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밝혔다.


제재 여파로 관용차 반입 2년 걸려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가 2019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용하는 메르세데스-벤츠 리무진을 대북제재 위반 물품으로 지적했다. [뉴스1]
대북제재는 이들의 일상에 깊숙한 영향을 끼쳤다. 수키닌 전 대사는 대사관에서 사용할 관용차량을 반입하는 데 2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대북제재를 경계한 도요타·미쓰비시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대사관 관용차는 물론 정비용 부품조차 팔지 않았다. 독일 폭스바겐은 비포장도로가 있는 북한 지역에서 사용할 지프를 구입하고 싶다는 영사관 요청을 '(북한에 반입이) 금지된 사치품'이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관용차로 사용할 벤츠 차량을 베이징 주재 자국 대사관을 통해 구입해 육로로 평양에 들여왔다고 설명했다.

FP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도 유엔 제재위에 평양 주재 자국 대사관이 관용차 운용을 위한 부품은 물론 컴퓨터와 복사기 등 기본적인 사무기기 사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외교공관도 전력난…생필품도 부족


북한은 코로나19 차단을 위해 지난해 1월부터 국경을 봉쇄했다. 사진은 지난 7월 평양 지하철에서의 방역 모습. [노동신문=뉴스1]

대사관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전력난과 생필품 부족을 겪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2011년 당시 평양에서 근무했던 캐런 울스턴홈 전 북한 주재 영국 대사는 물과 전력 공급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독일·스웨덴 대사관이 위치한 외교 단지는 발전기 한 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시리아 대사관은 "현지 시장에 외국인이 먹을 만한 식자재가 없고 의약품, 소비재, 전기 및 전자제품도 찾을 수 없다"며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것은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5년 9월부터 북한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어거스트 보그 당시 2등 서기관은 자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공급되는 전기의 전압이 낮아 오븐을 200도(℃)까지 예열하는데 2시간,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이는 데 1시간이나 걸린다"고 밝혔다. 그는 평양에서 생활하면서 '전력 부족'을 가장 피부로 느꼈다고 말했다.


와이파이 소문에 외교단지 집값 들썩


북한 정권수립 73주년 기념일인 지난 9월 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마스크를 쓴 북한 주민들이 열병식 불꽃놀이를 관람하며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캡처=연합뉴스]
그같은 외교단지 생활이라도 일반 주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특히 평양에 상주하는 외교사절은 허가를 받으면 무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있는데 외교단지 주변에서는 일반 주민들도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고 한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2014년 당시 탈북자 단체인 'NK지식인연대'의 자료를 인용해 평양 외교단지 주변 주택가에서 무선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집값이 급등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북한 주재 브라질대사였던 호베르투 콜린도 당시 VOA와 서면 인터뷰에서 "평양의 일부 국제기구들은 직원들이 집에서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강력한 통신망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해프닝으로 인해 북한 당국은 외국 공관과 국제기구에서 사용하는 무선 인터넷의 출력을 낮추거나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사용 허가를 내주는 등 보안 조치를 강화했다.


봉쇄 여파로 駐北 외교사절 엑소더스


지난 7월 평양에서 귀국하는 러시아인들을 환송하는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의 모습. [연합뉴스]
북한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지난해 1월부터 국경을 닫았다. 봉쇄의 여파로 외교관들조차 생필품 부족현상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각국 외교 사절들은 평양을 빠져나가고 있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NK뉴스는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대사관 직원 10여명이 이날 본국으로 귀환할 예정이며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에는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북한 주재 대사를 포함해 2명의 외교관이 남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매체는 팔레스타인 대사도 곧 평양을 떠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달에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에서 마지막까지 평양 대사관을 운영했던 루마니아가 철수하면서 북한에 남은 서방 외교관이 단 한명도 없는 상황이 됐다.

북한에는 러시아, 중국, 쿠바, 이집트, 라오스, 몽골, 시리아, 베트남, 팔레스타인의 외교관들이 남아있다. 북한 주재 외교사절의 엑소더스는 코로나19 사태가 완전한 진정 국면에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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