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누가 주인공이지? [아케인 봤더니]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아케인’의 장점은 명확하다.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은 인기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라는 점이다. 게임의 인기에서 시작된 LoL e스포츠의 열기도 점점 뜨거워지는 중이다. ‘아케인’이 공개되기 하루 전 열린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전은 전 세계 약 7300만명이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게임과 e스포츠 팬들을 작품으로 이끌고, 게임을 모르는 대중들을 작품을 통해 다시 게임으로 유입한다. 기존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아닌 LoL 제작사 라이엇 게임즈가 6년 동안 공들여 ‘아케인’을 제작한 이유다.
게임 속 세계관과 캐릭터 등을 영상화하는 아이디어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게이머들의 머릿속에도 영상으로 제작된 여러 게임이 스쳐지나갈 것이다. 게임을 영상화했을 때 커다란 단점이 발생한다. 게이머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축구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이 호날두와 메시처럼 뛸 수 있어서고, RPG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높은 레벨과 플레이로 주목받고 싶어서다. LoL을 즐기는 게이머들은 프로게이머와 똑같은 환경에서 같은 캐릭터를 플레이하며 페이커나 쇼메이커처럼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꾼다. 게임과 같은 세계관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며 다른 주인공에 이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부분 게임 영상화 작품들이 큰 실패를 맛보고 사라진 이유다.
‘아케인’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필트오버와 자운의 전쟁이 촉발되는 과정과 등장인물인 바이와 징크스의 갈등이 주요 서사로 다뤄진다. 동시에 ‘아케인’ 시즌1에는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는 일종의 미스터리 요소가 깔려있다. 바이와 징크스, 제이스, 케이틀린, 에코, 하이머딩거 등 LoL 게임에 등장하는 익숙한 캐릭터들이 주인공 후보다. 평범한 작품이면 바이나 제이스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누구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동료들과 함께할 줄 알고 특별한 능력까지 발휘하는 두 사람은 여러모로 영웅의 조건을 갖췄다. 그러나 ‘아케인’은 보기 좋게 그 기대를 배반한다. ‘아케인’의 주인공은 징크스다.
‘아케인’에서 징크스는 DC코믹스 속 조커처럼 그려진다. 언제나 유쾌함을 잃지 않고 시끄러우며 매우 폭력적이고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는 걸 즐긴다. 뛰어난 발명가인 동시에 정신병을 앓는 환자이기도 하다. 영화 ‘조커’(감독 토드 필립스)가 광대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 ‘다크나이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가 완성된 조커의 활약을 그렸다면 ‘아케인’은 그 둘을 모두 보여준다. 겁쟁이 파우더였던 어린 시절부터 미치광이 징크스가 되기까지 하나씩 서사를 쌓아올린 ‘아케인’은 결국 시즌1 마지막회에서 파우더와 징크스 중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는지 보여주기에 이른다.
징크스는 어린 시절 파우더와 현재 징크스 중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혼란스러워 한다. 어린 시절의 보호자였던 바이와 지금의 보호자인 실코 중 누구를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모두 외부의 시선이다. 징크스가 되길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넌 완벽해”라는 실코의 말이었다. 결정 직후 허탈해하는 바이에게 징크스는 “이렇게 변했어도 사랑해주길 바랐다”고 말하며 전쟁의 씨앗을 뿌린다. ‘아케인’은 더 나은 세상,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올바르고 합리적인 선택보다, 그 어떤 모습이어도 지금의 나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징크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이 남들과 다른 소수라고 믿는 사람들, 타인의 핍박에 스스로를 부정해야 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 LoL을 플레이하고 LoL e스포츠를 즐기는 게이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게임을 영상화하며 게이머들을 주인공에서 몰아냈던 과거의 잘못을 ‘아케인’은 반복하지 않았다. 낯설고 거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아케인’의 과감한 결정은 언제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게임을 통해 위로 받고 싶었던 게이머들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읽힌다.
‘아케인’은 오프닝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을 대리석 조각으로 표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전 세계인들이 교과서로 배우는 보편적인 서사를 만들고 싶은 욕심보다는 이미 게임 속에 존재하는 신화를 조심스럽게 재해석하려는 겸손에 가까워 보인다. ‘아케인’은 게임 세계관과 캐릭터, 스킬과 용어를 빌려온 수준이 아니다. 게임과 하나가 되려 한다. 현재 LoL 패치 버전을 플레이하면 ‘아케인’ 속 필트오버의 건축양식이 구현된 타워와 ‘진보의 날’에 울려퍼지는 음악, 하이머딩거 교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법공학 무기를 장착한 바이로 펀치를 날릴 수 있고, 신난 징크스로 총을 쏘며 뛰어다닐 수 있다. 나중엔 거꾸로 ‘아케인’ 속 인물이 게임에 곧 등장할 수도 있다. ‘아케인’을 제작하는 건 낯선 신화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신화의 원전을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아케인’은 폭력을 유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이야기여야 했다. 지금도 매일 소환사의 협곡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도록 게이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제작사 입장에선 필연적인 선택이다. ‘아케인’으로 LoL에 얼마나 많은 신규 유저가 유입되고, 얼마나 많은 LoL 게이머들이 이 작품을 사랑할지 아직 알 수 없다. 적어도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더 높은 티어와 더 짜릿한 승리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게이머들을 잊지 않은 작품인 건 분명하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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