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겨눈채 숨진 일등병..백마고지, 아직 13만명이 통곡한다 [뉴스원샷]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의 픽 : 백마고지 전투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시인 모윤숙은 6ㆍ25 전쟁이 일어난 뒤 서울이 함락되자 1950년 6월 28일 경기도 광주로 피난을 갔다. 도중 야산에서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국군 전사자를 발견했다. 시인은 눈물을 흘리며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를 남겼다.
죽어서 말한 국군이 또 있었다. 지난 24일 국방부가 공개한 국군 전사자 추정 유해가 그렇다.
지난달 28일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 정상에서 발견된 이 유해는 개인호에서 적 포탄을 피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측은 그가 사격하다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해 근처에서 계급장, 방탄모, 탄약류, 만년필, 숟가락 등이 발견됐다.
두개골과 방탄모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봐 그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적 총탄에 숨졌을 것이다. 전사자의 계급장은 일등병이었다. 현재 이등병에 해당한다. 그의 개인호는 진지의 가장 바깥쪽에 있었다.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녹슨 군번줄은 현장에 있었지만, 정작 전사자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인식표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직 이 ‘신병’은 사연을 전혀 알 수 없는 무명용사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백마고지 일등병의 유가족을 찾으려고 한다. 제보를 기다리면서, 유해의 DNA를 이미 6ㆍ25 전쟁 유가족으로부터 채취한 DNA와 비교할 계획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한다.
6ㆍ25 전쟁 때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은 16만 2394명이다. 이 가운데 2만 9202명만 현충원에 안장됐다. 13만명이 넘는 전사자가 아직도 백마고지 일등병처럼 이름 모를 산야에서 묻혀 있다.
지난 9월 기준 전사자 4만 3000천여명 유가족의 DNA 7만여점이 확보됐다. 전체 미수습 전사자의 30% 정도다.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백마고지 일등병은 6ㆍ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에서 숨졌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국군 3428명이 다치거나 숨졌다. 중공군에선 1만 4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일대를 내려다보는 목에 있다. 여기를 점령하면 철원 일대를 통과하는 유엔군 보급선을 위협할 수 있었다. 중공군이 3개 사단을 동원해 백마고지를 차지하려던 배경이었다.
백마고지의 주인은 무려 12번이나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30만발 가까운 포탄을 쏘아댔다. 6ㆍ25 전쟁 영웅인 고 백선엽 장군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이 하얗게 드러났는데, 멀리서 보면 백마 한 마리가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육군 9사단은 백마고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중공군을 물리쳤다. 9사단은 이를 기념해 백마부대라고 불리게 된다.
방종관 한국국방연구원(KIDA) 객원 연구원(예비역 육군 소장)은 “1951년 5월 현리전투의 참패 이후 심기일전한 한국군이 백마고지에서 화력을 중심으로 한 제병협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지난 10일엔 9명의 백마고지 참전용사들이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 어쩌면 백마고지 일등병의 전우였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70년 만에 이곳 백마고지를 다시 밟아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며 “이제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미리 써 온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10월이 오면 생각난다. 전우 생각. 무성한 수풀 속에 고이 잠든 응길아. 내가 왔다. 벌떡 일어나 내 품에 안겨다오.”
국가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6ㆍ25 전사자 13만 3192명의 유해를 수습하고 가족을 찾아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다. 우리 모두의 숙제이기도 하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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