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안도 김중성, 정조대왕에게 고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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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신문]
또한 윤선도의 <고산유고>에는 "봄과 여름에는 해초(海草)를 따는 이들이 포구(浦口)에 널려 있고, 가을과 겨울에는 매 사냥을 하는 자들이 산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노슬도(露瑟島)와 서로 인접하여 양안(兩岸) 가까운 곳에서는 서로들 얘기할 수가 있는데, 노슬도에는 원래부터 거민(居民) 1백여 호가 있고 해숭위(海崇尉)의 농호(農戶)의 감관(監官)도 여기에 있으니, 인간 세상의 귀와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완도 보길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보길도라는 섬에도 해초를 따는 사람들이 널려 있고 또한 선조(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한 윤신지(尹新之)에게 공납을 바치는 해숭위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곽세(藿稅)라고 하면서 호남의 곽전(藿田)과 태전(苔田)은 혹 생기기도 혹 폐지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몇 파(把) 몇 속(束)으로써 그 세액을 정할 수 없으니, 우선 예전 세액에 따라 참작해서 재감(裁減)한다. 생각건대, 곽(藿)이라는 것은 해대(海帶)이고(방언으로 미역) 태(苔)라는 것은 해태(海苔)인데, 혹 감곽(甘藿), 감태(甘苔)라 일컫기도 한다. 태는 또 종류가 많아서 자태(紫苔: 속명은 海衣이고 방언으로는 김이라 함), 청태(靑苔)가 있어 대동소이한 것이 5~6종이나 있다.
호남 미역밭(藿田)세로서 전관 수효가 보이지 않으니 지금에 와서 밝힐 수 없다. 그러나 "둘레가 100여 보에 불과한 탄환(彈丸)만한 섬에 대해 사가(私家)에서 세로 혹 200~300냥을 징수하며, 직경이 10여 보인 주먹만한 돌은 사가에서 매매하는 값이 혹 200~300냥에 이르기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함부로 채취할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러 도 선박・염분(鹽盆)・어지(漁地)・곽전(藿田: 미역밭) 중에 혹 은루(隱漏)되었다가 다른 일로 인해서 발견되는 것이 있으면 수령은 전결(田結)을 은루한 죄로써 따져묻고, 감리(監吏) 및 본 주인은 엄형(嚴刑)해서 변지에 정배한다" 하였다. 엄하게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덧붙여서 <목민심서>에서 "곽전(藿田)이나 태전(苔田)은 모두 토호들의 점유가 된 지 오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아무나 흔하게 채취하는 물목이 아니었다는 소리이다.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도 "해세(海稅)는 각 도의 대소 선척(船隻)과 각 도의 염분(鹽盆)・곽전(藿田, 미역 따는 밭)과 연해의 어전(漁箭)・어조(漁條)・어장(漁場) 어기(漁基)・강전(江箭)에 대하여 모두 등급을 나누어서 세금을 수납하였다.
경상도의 세전은 2만 7천 4백 냥, 전라도의 세전은 4만 2천 9백 냥, 충청도의 세전은 1만 1600냥, 경기도의 세전은 6100냥, 황해도의 세전은 1만 500냥, 평안도의 세전은 5000냥, 함경도의 세전은 5500냥, 강원도의 세전은 5300냥인데, 그 해 사정에 따라서 가감하였다고 하여 전라도가 가장 많은 세금을 납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완도의 보길도와 소안도는 중요한 미역을 공납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실록 1800년 3월 22일 기록에 소안도(所安島)에 사는 백성 김중성(金重聲) 등의 상언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안도는 제주에 왕래할 때 순풍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왕명을 받든 관원의 행차가 제주에 가는 길에 순풍을 기다리며 연일 머물 때, 일행의 여러 사람을 접대할 비용을 마련하고 공궤(供饋)하는 등의 일을 모두 섬 백성에게 책임 지우고 있습니다. 순풍을 며칠이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므로 공궤도 얼마나 해야 할지 정해진 수량이 없으니, 가난한 섬의 백성들은 부모를 봉양하거나 처자식을 부양할 수가 없습니다.
(…) 감곽(甘藿 미역)은 본도(本島)에서 나는 물건인데 진상한 뒤에야 이익을 얻습니다. 중대한 일에 구애되기에 별도로 읍내의 부지런한 사람을 정하여 폐단 없이 진상하도록 하였지만, 폐단이 없지 않았으므로 바로잡을 때 이 명색을 혁파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섬의 백성들이 진상해야 마땅한데도 본읍 남창(南倉)의 색리가 바로잡은 절목을 무시하고 함부로 한꺼번에 독점한 다음 남은 이익을 모조리 가로챘습니다. 세로 납부하는 돈 30냥은 포구의 백성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납부하게 하고, 매년 동지사(冬至使)가 청구한 것이라고 하면서 50냥의 돈을 거두었고, 또 어호(漁戶) 15명에게 1호당 10냥의 돈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 1825년 11월 19일의 기록을 보면 완도의 바닷가 사람들이 살았던 환경에 정말 눈물이 난다. 정말 눈물 나는 기록이다.
"한겨울에 전복을 캐고 한추위에 미역을 채취하느라 남자와 부녀자가 발가벗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떨면서 물결에 휩싸여 죽지 않은 것만도 참으로 요행이며, 해안에 불을 피워놓고 바다에서 나오면 몸을 구워 피부가 터지고 주름져서 귀신처럼 추한데 겨우 몇 개의 전복을 따고 어렵게 몇 줌의 미역을 따지만 그 값으로는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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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에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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