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끝까지 조선인 피해자 편에 섰던 일본 지식인

전은옥 2021. 11. 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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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자네 야스노리 유고집 '흔들림 없는 역사 인식' 번역 후기

[전은옥 기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중 약 10%는 조선인이었다. 일본 국민이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따른 희생자라는 역사 인식의 부족이다."

일본 지식인 다카자네 야스노리의 삶과 사상, 실천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그의 유고집 <흔들림 없는 역사 인식>(삶창, 2021)이 출간되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자국의 '가해 역사'를 고발하며 일본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물은 학자였다.  
 
 다카자네 야스노리 지음, 전은옥 옮김, 『흔들림 없는 역사 인식』, 삶창, 2021.
ⓒ 도서출판 삶창
 
나는 바로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 기획자이자, 번역자다. 내가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하기로 결심한 까닭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저자의 삶과 실천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충분히 조명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의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규슈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후 나가사키대학에 부임(1969년)하였고, 2005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대학교수로서 학생을 지도하는 한편, 생텍쥐페리에 관한 탁월한 논문을 다수 저술하여 프랑스 정부가 주는 학술공로훈장 기사장(2006)을 받기도 했다.

뛰어난 불문학자에서 식민주의와 차별에 맞서는 운동가로
 
 다카자네 야스노리
ⓒ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그는 뛰어난 학자이자 동료와 제자,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대학교수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77년, 강제추방이 결정된 재일조선인과 한국인 밀항자를 장기간 구금하며 '동양의 아우슈비츠'로 불린 오무라 입국자 수용소의 실태조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 오카 마사하루를 만난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차별과 억압을 당하던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운동과 조선인 원폭피해자 실태조사,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조사 등에 전면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 조사를 근거로 일본 정부와 기업에 맞서 싸우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피해를 입은 동아시아 민중의 편에 서서 전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피해자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법적 투쟁을 진행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난징대학살 등의 희생자의 아픔을 알리기 위하여 피해자와 연구자를 직접 초청해 증언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는 패전 후에도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청산을 하지 않은 채, 그들만의 평화와 고도성장에 취해 있던 일본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허구성과 한계를 꿰뚫은 진정한 '탈식민주의자'적 행보였다.

다카자네 야스노리는 메이지 유신 이래 아시아 침략을 자행한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뿐 아니라, 패전 후에도 면면히 이어진 '현재' 일본 내부의 식민주의와 차별을 뿌리 뽑고자 노력한 탈식민주의자였고, 재일조선인을 비롯하여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싸운 반차별주의자였다.

식민 지배의 피해 입은 아시아 민중의 편에 서다

그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아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일원(사무국장)으로서, 오카 마사하루 대표와 함께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나가사키 전역을 돌며 조선인 강제연행 · 강제노동과 원폭 피해에 관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원폭 피폭지인 히로시마시· 나가사키시조차 조선인의 원폭 피해에 관한 제대로 된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쉬운 길은 아니었다. 증언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드물었고, 가해자의 입장에 선 이들은 때로 "기억 안 난다", "모른다", "차별은 없었다" 등 본인에게 유리한 거짓 증언을 하거나 응답을 회피하기도 했다. 발로 현장을 누비며, 오랜 수고와 집념, 투혼으로 써 내려간 조선인 강제연행과 원폭 피해 실태조사 보고서는 <원폭과 조선인(原爆と朝鮮人)>(1~7집)(1982~2014)으로 출간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쓰비시가 운영한 인공의 해저 탄광섬 하시마(군함도)에서 사망한 조선인과 중국인 명부 및 중국인 강제노동의 기록을 발굴하기도 했다. 1979년에 오카 대표와 함께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한 후로는, 매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8월 9일 아침 7시 30분에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식을 개최하고 '평화 메시지'를 발표했다.

'가해'의 역사를 전시하는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그는 1994년 오카 마사하루의 서거 후, 일본의 가해 역사를 전시하고 교육하는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아래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설립(1995)했다. 일본에는 전쟁박물관, 평화박물관은 많지만, 대부분이 '피해'를 전시하고 추념하는 공간인데, 다카자네와 그 동료들이 세운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은 다르다. 침략과 식민지배, 학살, 강제연행과 차별 등 '가해'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책에도 부록으로 실린 자료관의 '설립취지문'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명문장이며, 설립자인 다카자네와 동료들의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중 일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는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만큼 국제적인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료관을 방문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이 가해의 진실을 앎과 동시에 피해자의 아픔을 생각하며, 전후보상의 실현과 비전(非戰)의 맹세를 실천하는 데 헌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교육자였던 만큼 자료관 사업에서도 젊은 세대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2002년부터 매년 8월, 일제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대학생을 선발하여 중국 난징과 상하이 등으로 평화기행을 다녀오는 '중일 우호 희망의 날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보고회도 개최했다.

2006년~2010년에는 당시 징병제가 존재하던 독일의 병역거부 청년 다섯 명의 대체복무를 자료관에서 받아주기도 했다. 매년 1명의 독일인 청년이 11개월 동안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에서 정해진 시간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시민과의 대화, 강연회에 대담자 또는 강연자로 참여했다.

역사에 책임지는 '역사 윤리'를 관철한 생애
 
 1979년 8월 9일, 조선인 원폭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하고 오카 마사하루(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책에는 저자의 일생 과업이었던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과 원폭 피해의 실상, 전후보상문제 및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를 뜻하는 역사윤리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긴 글이 수록되었다.

그의 삶과 운동의 최종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설립 과정과 활동상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민중의 연대에 대한 저자의 열망과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중의 자세도 엿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 평화인권운동가인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는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일제와 한 몸이 되어 일제의 부흥과 영광을 꿈꾸는 자들이 행세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다카자네 선생은 참으로 일본과 동아시아의 연대, 평화의 미래를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제시하고 매진한 분으로서 한일 갈등이 거론되는 지금이야말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분이다."

많은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하여,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로 한 평생을 살았던 한 인간의 숭고함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민중 연대와 평화의 미래를 열어갈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바란다. 저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과 실천, 역사 인식은 그와 동료들이 함께 세우고 일군 나가사키 평화자료관(www.okakinen.jp)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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