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만화를 캔버스에 옮긴 듯한..

2021. 11. 2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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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1970년대生 中 화가 첸케
‘드래곤 보트(The Dragon Boat, 2010년)’. 자신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반추해 아이들의 고독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당신은 한 점의 그림에서 구원과도 같은 마음의 위로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미술품 가격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체 경신을 거듭하는 오늘날, 어느덧 미술의 본질적 가치는 잊은 채 투자와 경제적 가치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좋은 미술은 여전히 마법처럼 우리를 매혹하고, 차가워진 심장을 어루만져 따뜻한 위안을 준다. ‘예술은 사람들이 겪는 영적 위기와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라던, 1970년대 출생 중국 화가 가운데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첸케(Chen Ke, 1978년생)의 말처럼.

2005년 회화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을 무렵, 그녀는 이미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낭만적이면서도 순수한 이미지가 특징적인 첸케의 초기 작품은 극장이나 TV 모니터를 통해서 보던 디즈니 만화가 마치 캔버스라는 또 다른 현실 속에 구현된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법의 머리카락(Magic Hair)’이라는 제목의 2005년작이 있다. 이는 그녀의 초기작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측면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함축적으로 집약된 초기 작품의 아주 전형적인 예다.

중국 인형처럼 하얀 피부를 지닌 다소 기이한 외모의 소녀가 큰 대야 속에 발을 담그고 서서 머리를 감고 있다. 자신들만의 환상, 내지 공상 세계 속에서 혼자 사는 어린아이들을 상징적인 주제로 다루는 초기작의 특징이 이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의 환상 세계에 고립된 아이들의 고독함은 2005년 이후 작품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중국 전통 산수화처럼 하얀 여백을 배경으로 물감을 묽게 사용하되, 신선하고 생생한 색채로 만화 속 인물처럼 소녀를 깜찍하게 묘사했다.

팔다리와 몸통은 비율에 맞지 않게 가늘고 간략하게 묘사하고, 대신 소녀의 머리카락 표현에 붓질 테크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미묘하게 톤을 달리하며 색채를 풍부하게 사용해 관객의 관심을 머리카락에 집중시킨다. 소녀의 작고 여린 몸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머리카락 표현은 그녀가 어떤 마법에 걸려 있음을 암시한다. 물결치듯 자라나는 나무뿌리처럼 소녀의 머리카락은 화면 밖으로까지 뻗치며 흐르는 강물처럼 무한한 시공간의 세상으로 천천히 구불구불 흐른다. 마법에 걸렸는데도 아무 걱정거리가 없는 듯한 장밋빛 발그레한 뺨과 부드럽고 따뜻한 파스텔 색조로 표현된 몸은 천진난만 동심의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이 작품 이후 첸케는 다소 어두운 톤으로 고독한 어린아이의 세계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종종 자전적인 그녀의 그림은 이런 측면에서 어린 시절을 혼자 보낸 요시토모 나라의 작품 속 반항적인 어린아이들과도 닮아 있다. 나라처럼 첸케 역시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정서적 과정을 반추하고 자기 성찰을 하기 때문이다.

‘드래곤 보트(2010년작)’에는 한 아이가 홀로 물가 한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다.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길을 잃어 처량해진 듯한 순간에 마법에 의해 움직이는 드래곤 보트가 그에게 기적처럼 나타나 조용히 다가온다. 이 아이는 이 순간에 얼마나 안도를 느꼈을까. 이런 안도감은 관객에게도 지친 일상에 마법 같은 위안을 전한다.

이 작품은 2010년에 열린 첸케의 개인전 ‘세상의 끝과 감정을 숨기는 이상한 나라’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 일본의 인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전시 제목으로 차용했다.

이와 관련 “작품에서 ‘구원의 느낌’을 찾고자 했다.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물리적 세상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한정적이고 한없이 연약하다는 버거운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준다. 예술은 그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로운 회화 주제와 스타일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온 첸케는 2012년부터 프리다 칼로에서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여성 실존 인물을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의 사회적 상황과 경험에 초점을 맞추면서 여성 캐릭터를 예리하게 해석하고, 여기에 첸케는 실제 삶 속에서 자신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거침없이 성공 가도를 달리던 29살 마릴린 먼로가 희망에 부풀어 꿈꾸듯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2015년작 ‘1955년-뉴욕-29살’이 그 좋은 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마릴린이 뉴욕 앰배서더 호텔 발코니에 기대어 선 채,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면서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을 본다. 유명 배우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한 순간을 담은 한 장의 흑백 사진을 각색한 이 그림이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우리는 불과 7년 뒤, 그녀가 서른여섯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좌) ‘마법의 머리카락(Magic Hair, 2005년)’. 이 작품은 그녀의 초기작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측면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함축적으로 집약된 초기 작품의 좋은 예다. (우) ‘1955년-뉴욕-29살(1955-New York-29 Years Old)’. 2020년 7월 10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낮은 추정가의 두 배가 넘는 금액(360만홍콩달러)에 낙찰돼 첸케의 전작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녀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채, 누구나 선망하는 도시 뉴욕을 향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외치는 마릴린의 모습을 담은 이 대형화는 너무도 강렬하게 관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대상에게 자신을 투영한 화가의 모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꿈꾸던 시절을 떠올린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인생이 이토록 덧없기에 매 순간이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생의 진실을 대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다채로운 경험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표현해내는 첸케.

평범하게 지나치는 듯 보이는 삶의 모든 순간을 깊이 파헤쳐냄으로써, 매 순간 발견되는 감정과 표현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일깨우는 듯하다.

화가 자신과 그림 속 대상 사이의 감성적 연결, 그리고 그것을 통해 관객에게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정서적 연결고리의 비밀을 찾아낸 첸케의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5호 (2021.11.24~2021.11.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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