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국의 소멸과 회한

임기환 2021. 11. 2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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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37] 674년 8월,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다시 책봉하였다. 670년 8월 1일 안승을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책봉한 지 꼭 4년 만이다. '보덕(報德)'은 신라 문무왕의 덕(德)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안승이 문무왕으로부터 받은 '고구려왕'이란 칭호는 비록 책봉호라고 하더라도 나름 독자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부흥시킨다는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보덕왕'이란 칭호는 단지 신라왕에 대한 종속성이 크게 강조된 칭호일 뿐이다. 이처럼 고구려왕에서 보덕왕으로 바뀐 책봉호가 이제 안승의 처지가 바뀌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신라 정부가 안승에 대한 대우를 바꾼 배경은 고구려 부흥군이 당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해 안승으로 대표되는 한성 고구려국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신라 정부 역시 백제 지역을 장악한 이후에는 한성 고구려국과 연합하는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본래의 신라 영토인 임진강과 한강 일대를 최종 전선으로 삼는 전략적 변화를 꾀하였다. 이에 고구려 부흥군은 당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중심지인 한성을 내주고 임진강 이북의 영역마저 빼앗기고 신라로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669년에 안승과 4천여 호가 투항하였고 670년에 이들을 금마저(金馬渚)로 이주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기록상 오류인 듯하다. 673년 말~674년 초에 한성 고구려국의 주민과 부흥군이 모두 신라에 투항하였고, 이때 신라 정부는 4천여 호 주민 집단을 금마저로 이주시켰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금마저는 오늘날 익산으로 비정된다. 물론 고구려 부흥군의 군사력은 여전히 북쪽 전선에 투입하여 신라군의 통제력 안에 두었을 것이다.

한성에서는 스스로 고구려국의 재건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려 있었지만, 이곳 금마저에서는 신라 정부가 허용한 범위에서만 고구려인의 자존을 지킬 수 있을 뿐이었다. 즉 한성의 고구려국에서 금마저의 보덕국으로 바뀐 것은 이름 그대로 완전한 신라의 부용국이 되었음을 뜻한다.

금마저로 이주한 한성 고구려국 주민 4천여 호 집단과 안승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일단 이들 주민 집단의 성격이 중요하다. 고구려 멸망 후 669년 4월에 당이 고구려 지배층 등 주민에 대한 대대적인 사민(徙民)을 추진하였을 때, 주 대상은 평양성 주민들이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사민의 피해를 적게 입었을 한성의 주민들과 평양성 등지에서 이탈한 일부 주민들이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즉 이들 주민 집단에는 국가 운영의 경험을 가진 지배층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이들 주민 집단을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는 왜 안승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 집단을 고구려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백제 지역의 금마저(현 익산)로 옮긴 것일까? 금마저 지역은 백제 말기에 왕도(王都)급의 위상을 갖는 정치적 중심지의 하나였다. 현재 익산 일대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 유적들이 그러한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백제시대 금마저의 위상으로 볼 때, 이 지역에는 유력한 백제 세력이 잔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안승 집단의 금마저 이주는 곧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신라 정부의 조처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금마저에 백제 도성 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점도 보덕국의 새로운 안식처로 신라 정부에 의해 선정된 배경으로 짐작된다. 보덕국도 형식적이나마 엄연히 독립된 국가이기에 그에 걸맞은 위상과 면모를 유지해야 하였다. 이때 백제시기에 왕도급으로 조영되었던 금마저의 도성 시설은 보덕국의 형식적 외양을 갖추어 주는데 제격이었을 것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 /사진출처=국립 익산박물관
하지만 현재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고구려 유민 세력의 존재를 보여주는 유적, 유물의 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아마도 금마저와 보덕국을 연관 지을 문헌 자료가 없었다면, 왕궁리 유적에서 고구려인의 숨결을 읽어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비록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보덕국은 잠깐이라도 머물렀던 자신의 거주지에서조차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다만 '일본서기'를 보면 보덕국은 671년부터 683년까지 8차례에 걸쳐 거의 매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렇다고 이런 행적을 보덕국의 독자성을 반영하는 증거로 볼 수는 없다. 신라 정부에 의해 전혀 낯선 금마저 땅으로 옮겨진 보덕국은 어차피 독자적으로는 존립할 수 없었다. 신라에 대해 스스로 이용 가치를 높이거나 아니면 신라 정부의 아량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더구나 보덕국이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는 활동 역시 신라 정부의 협조 아래 이루어졌다. 즉 신라가 보덕국 사신을 배로 일본까지 호송한 것이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배후의 일본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우호적 외교적 관계가 절실했다. 그래서 신라는 일본과의 외교에 보덕국을 이용한 듯하다. 바로 이 점이 신라가 보덕국의 존립과 독자성을 유지시킨 주된 요인의 하나였다.

이처럼 한성 고구려국과 그 뒤를 이는 보덕국의 운명은 그 탄생이 나당전쟁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동 틈새에서 가능하였듯이, 그 소멸 또한 정세의 변동에 따라 언제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보덕국의 운명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문무왕은 680년 3월에 안승과 자신의 누이를 혼인시켜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아마도 장차 안승에게서 보덕왕의 지위를 박탈할 때 미안한 마음을 좀 덜기 위해서였을까? 그래도 직접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고, 또 나당전쟁에서 안승의 공적을 잘 알고 있던 문무왕이 재위할 때에는 차마 안승의 지위를 박탈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681년 8월 신문왕이 즉위하자 이제는 과거의 정리(情理)조차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신문왕이 즉위 후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자, 보덕왕 안승은 이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부랴부랴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683년 10월에 신문왕은 안승을 서라벌로 불러들여 소판(蘇判)의 벼슬과 김(金)씨 성을 주어 왕족으로 예우하고 좋은 집과 토지를 내리는 은혜를 베풀었다. 소판은 신라 17관등 중 3위 관등으로 진골만 지낼 수 있었으니, 안승을 진골로 대우한 것이다. 이렇게 안승 개인이야 부귀를 누릴 수 있었을지 몰라도, 고구려 유민들의 자존을 담고 있던 보덕국은 이제 그 간판마저 내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신라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684년 11월에 금마저 보덕국인들은 무력 봉기하였다. 여기에는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고구려의 계승과 귀속 의식을 지키려는 측면과 한편으로는 10여 년간 누려오던 보덕국의 자치권을 박탈한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신라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남원 등 남쪽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이렇게 보덕국은 소멸하였다.

물론 보덕국의 반란은 강력했다. 반란 진압 과정의 보덕성 전투에서는 신라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하였고, 가잠성에서는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인 김영윤(金令胤)이 전사할 정도였다. 김영윤은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반굴의 아들로서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손자였다. 특히 금마저 보덕국에서만 반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들 고구려 유민들이 가잠성까지 이동하여 저항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가잠성은 지금 안성 일대로 비정되는데, 그 위치로 보아 이들 보덕국 유민들은 얼마 전까지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황해도 한성 땅으로 이동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고구려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을 지켜가려는 저항이었다.

그런데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투입된 황금서당은 다름 아니라 683년(신문왕 3)에 편성된 9서당(九誓幢)의 하나로서 고구려 사람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아마도 고구려 멸망 직전 신라에 투항한 사람과 평양성 함락 때 신라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유민인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같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황금서당이 동원되었다는 점에서 멸망한 나라의 주민들이 겪는 회한을 짐작할 수 있다. 정복당한 나라의 유민들이 정복자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의 나라와 기억을 모두 잊어야 했으리라.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685년 5월에 고구려(보덕국)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이듬해인 686년 9월에야 귀국하였다. 무려 1년 5개월에 걸친 긴 사행 기간은 물론 당시는 이미 보덕국이 소멸된(684년) 이후였기 때문에 여러 의문이 드는 기사이며, 이 기사에 뒤이어 다수의 고구려인들이 귀화했다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당시 일본 사신은 보덕국 소멸 이후 그 유민들의 동향과 관련하여 파견되었다가 보덕국 망명객들과 함께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끝내 신라에 저항한 보덕국 주민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렇게 보덕국이 소멸된 후 신라 정부는 보덕국의 관료층을 신라 관등 체계 내로 편입시켰다. 이들은 백제 유민들보다는 한결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보덕국의 군사력도 신라 중앙군으로 편입하여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을 구성하였다. 사실 신라 정부가 복속지의 주민들에 대한 정책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보덕국 사람들은 상당히 나은 처우를 받은 편이었다. 9서당 중에서 백제인을 대상으로 2개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와는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 소수의 보덕국인을 대상으로 2개 부대를 편성한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제 땅에 남겨지지 못하고 정복자의 땅으로 여기저기 이주당한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 중에서, 이들 보덕국인들은 그나마 덜 불운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인 한성 고구려국과 보덕국은 그 존립 기간 자체가 16여 년에 불과하여 거의 눈길을 끌만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관심이란 반드시 뚜렷한 자취만을 뒤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적 없이 스러져간 보덕국과 같은 존재를 통하여 사필(史筆)의 냉혹한 현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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