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31번 번호표와 1.7% 금리

이성규 2021. 11. 25.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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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늦가을 새벽, 은행 문 앞에 줄을 서는 이들이 있다.

서민전용 상품인 디딤돌 대출 금리가 오른다는 소문에 0.1%라도 싸게 돈을 빌리기 위해 무작정 줄을 선 사람들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8일 '최근 대출금리 상승 등에 대한 설명자료'를 내고 시중은행의 대출금리 상승은 은행이 붙이는 가산금리보다 금리 기준이 되는 준거금리 상승 때문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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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 경제부장


쌀쌀한 늦가을 새벽, 은행 문 앞에 줄을 서는 이들이 있다. 서민전용 상품인 디딤돌 대출 금리가 오른다는 소문에 0.1%라도 싸게 돈을 빌리기 위해 무작정 줄을 선 사람들이다. 3시간을 밖에서 떤 뒤 받아든 번호표는 31번이었다. 무명씨는 하루 선착순 30명까지 신청이 가능하다는 말에 ‘고객님’ 호명을 받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출을 받을 수 있을까, 금리는 언제 오를까’ 걱정하는 서민들에 비해 일부 공무원은 연 금리 1%대의 특혜성 대출을 관행처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신한은행은 지난 9월 국세청 직원 전용 신용대출 한도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국세청에 이 정보를 사전에 ‘친절히’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 은행은 신용등급이 최하위인 10등급이라도 국세청에 소속돼 있으면 평균 연 1.70% 금리로 최대 2억원까지 신용대출을 해줬다. 지난 9월 10일부터 이 한도가 1억원으로 줄어드는데 그 열흘 전에 국세청에 사전 통보를 해줬고, 이를 인지한 일부 직원은 ‘대출 쇼핑’에 나섰다. 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금리 ‘대출 절벽’에 몰리는 사이 ‘힘 있는’ 공무원들만 특혜를 누린 셈이다.

공무원·공공기관 직원을 대상으로 한 특혜성 저금리 대출은 다른 은행들에서도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우리·하나·NH농협·신한은행)이 공무원연금관리공단, 경찰청, 국세청 등 기관과 협약을 맺고 판매 중인 대출 상품은 28종에 달한다. 금리도 연 1.25%(KB무궁화 신용대출), 연 1.69%(NH 공무원생활안정자금) 등 웬만한 최고 신용 등급자에게 적용되는 금리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런 문제점을 담은 최근 국민일보 보도에 해당 부처는 관행처럼 이어져온 제도인데 왜 문제로 삼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행정고시에 합격하거나 힘센 부처 소속이면 당연히 일반인보다 좋은 조건의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비뚤어진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31번 대기표’를 손에 쥐게 만든 금융 당국도 떳떳하다. 금융 당국은 올 하반기 가계부채를 곧 폭발할 경제의 뇌관 취급을 하면서 예고 없이 가계대출을 옥죄었다. 시중은행은 이에 화답하듯 우대금리를 폐지하고 가산금리를 높이는 방식으로 이자수익을 늘렸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8일 ‘최근 대출금리 상승 등에 대한 설명자료’를 내고 시중은행의 대출금리 상승은 은행이 붙이는 가산금리보다 금리 기준이 되는 준거금리 상승 때문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입장을 밝혔다.

금융위가 ‘가산금리 상승폭이 과도하지 않다’며 제시한 5대 은행의 준거·가산금리 변동 기간은 올 6~10월로 한정돼 있다. 금융위는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의 금리 상승폭(0.68% 포인트) 중에서 준거금리 상승폭(0.64% 포인트)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기간을 지난해 10월부터 올 9월까지 1년으로 넓히면 금융위의 해명은 옹색해진다. 주담대 변동금리의 경우 올해 들어 지표금리(신규 코픽스)가 0.39% 포인트 오르는 동안 대출금리는 0.92% 포인트(상단 기준) 뛰었다. 시중은행이 금융 당국의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빌미로 가산금리를 올리고 우대금리는 줄이는 방식으로 금리를 크게 끌어올렸다는 건 ‘팩트(사실)’인 셈이다.

가계부채 이슈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십수년간 금융 당국은 잊을 만하면 가계부채 대책을 내놨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 과오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갑자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피해는 돈 없는 서민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수십억원대 자산을 가진 금융 당국 고위 공무원들이 이런 어려움을 알지 모르겠다.

이성규 경제부장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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