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야구가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
프로야구 한 시즌이 끝났다. 40년 응원하는 팀이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 기질을 드러내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덕분에 기꺼운 마음으로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두산 선수들은 팬 앞에서 야구의 미학이 호쾌함이 아니라 인내와 끈기로 승리를 얻어내는 것임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는 전사의 윤리가 있었다. 시민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에게 방패를 쥐여주며 당부했다. “이 방패로 적과 맞서 싸운 후 이겨서 돌아오든지, 이 방패에 실려서 돌아오라.” 이 말에 전쟁 같은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할 두 가지 명예가 담겨 있다. 첫 번째는 클레오스(kleos), 전장에서 목숨까지 던져서 헌신함으로써 동료들에게 영웅으로 인정받는 일이다. 방패에 실려서 돌아올 운명을 타고난 아킬레우스의 명예다. 두 번째는 노스토스(nostos), 온갖 죽음의 고난을 이겨낸 후 방패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스무 해 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인간이 겪을 모든 고통을 극복하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명예다. 향수를 뜻하는 말 노스탤지어(nostalgia)가 여기에서 나왔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그려냈듯이 모든 이야기는 목숨을 바쳐서 불후할 명예를 얻는 아킬레우스 이야기이거나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영광을 얻는 오디세우스 이야기 중 하나다. 적들과 직접 몸으로 맞서 싸우면서 골을 넣는 한순간에 몰두하는 축구가 전사 아킬레우스의 서사시를 반복한다면 끝없이 닥쳐오는 죽음의 유혹을 몸과 꾀를 함께 써서 넘어서면서 홈으로 돌아오는 일에 집중하는 야구는 현자 오디세우스의 서사시를 재현한다.
한마디로 야구는 귀향의 게임이다. 세 차례 주어진 죽음의 기회를 이용해서 무슨 수를 쓰든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펼쳐낸다. 태어난 후 하루하루 짧아지는 인간의 삶처럼 걸어야 할 길은 정해져 있으나 곳곳에 펼쳐진 죽음의 지뢰를 피해 돌아올 영예를 얻을 방법은 무한하다. 홈런 한 방처럼 대박을 낼 수도 있고, 안타·번트·볼넷·도루 등으로 노력을 꾸준히 쌓아갈 수도 있고, 상대방의 실책·폭투 등의 우발적 행운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닮았다.
누상에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려고 버둥대는 선수들을 보면서, 팬들은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열광과 분노와 용기와 실망과 위안을 거기에 겹쳐 쓴다. 우리도 “아내보다 독수리한테 더 반가운 사람이 되어 대지에 눕지”(‘일리아스’) 않고 고난을 견디고 죽음을 이겨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것이 야구의 근본 감정이다. 안타를 많이 치고 출루를 자주 해서 아무리 잔루를 남긴다 해도, 홈플레이트로 돌아와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는 일만 못하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말한다. “부부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금실 좋게 살림을 살 때만큼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없다.”(‘오디세이아’) 금실 좋은 살림은 “적에게는 슬픔이고 친구에게는 기쁨”이며 “그 명성은 오로지 그들 자신만 누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전장의 명성은 죽은 영웅도 얻을 수 있으나 정다운 금실은 살아 돌아온 영웅과 그 아내만 느낄 수 있다. 가치의 질이 다르다.
오디세우스가 저승에서 만난 클레오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고백한다. “죽은 자를 다스리느니 나는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뱅이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그가 궁금한 것은 “예전에도 그대만큼 행복한 전사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찬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소식뿐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죽음의 영예보다 귀향의 명예가 소중하다. 야구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환기한다.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루더라도, 가족과 쌓은 작은 추억만 못하다. 그러니 오늘도 무사히 돌아가 가족과 저녁을 즐기는 더없는 영예를 누릴지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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