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기다림의 시간
교회력으로 1년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해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을 거쳐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그 주기를 완성한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다림은 설렘과 조바심을 동시에 안겨준다. 설렘은 다가올 존재에 대한 기억 혹은 기대가 우리 영혼 속에 일으키는 작은 파문이다. 조바심은 그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흔들림이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세상사에 초연한 사람이거나 영혼의 불씨가 꺼져가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다가오는 시간을 공포로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미래보다는 과거에 기대 현실의 공포를 이겨내려 한다. 기다린다고 하여 시간이 빨리 흐르지도 않거니와 밀어낸다고 하여 시간이 뒷걸음질 치지도 않는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보드 위에서 파도를 타고 나아가는 서퍼들처럼 시간의 파도를 타고 영원의 해안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도 낡아질 수 있다. 사실 이 말은 어폐가 있다. 낡아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 경험이다. 삶은 반복이다. 매일 반복하는 일들이 우리 힘을 고갈시킬 때가 많다. 반복에 지친 이들은 커다란 변화를 꿈꾼다. 새로운 사람이나 물건, 장소에 대한 맹목적 그리움은 그렇게 발생한다. 그러나 반복이 늘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늘 흐름 혹은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반복 속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차이가 우리 삶의 무늬를 이룬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 마디를 만들어 지속하는 시간의 권태를 이겨내려 한다. 국가가 제정한 기념일, 축제, 각 개인의 일정표에 매년 기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적 기념일들은 시간을 건너기 위한 일종의 징검돌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일곱 번째 달인 티쉬리월에 로쉬 하샤나라는 신년 축제를 즐긴다. 대략 9월 중순부터 10월 초순에 해당하는 날이다. 로쉬 하샤나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날, 허비한 인생을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는 날, 하나님께 돌아가는 날이다. 이날을 알리는 제사장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가까운 냇가나 강에 나가 옛 삶의 흔적을 띄워 보내는 의례를 행한다.
20세기의 유대 철학자인 마이마너디는 뿔 나팔 소리 속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너의 악한 방법과 생각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로쉬 하샤나는 시간을 새롭게 하는 의례인 셈이다.
겨울의 초입에서 맞이하는 대림절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간의 파도를 타고 넘느라 힘겨웠지만 삶의 열매는 부실한 것 같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기 쉬울 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푼푼하기는커녕 서부렁하기 이를 데 없어 부끄럽지만 우리 삶을 시간의 주인이신 분 앞에 내놓아야 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사 꾸지람을 들을지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꾸지람은 우리를 불모의 땅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사랑일 테니 말이다. 나태함과 변덕스러움, 비열함과 잔혹함이 넘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평화와 생명을 꿈꿀 수 있다면 아주 버림받은 생은 아니다.
대림절의 초에 하나둘 불이 밝혀질 때 우리 속에 도사린 어둠과 우리 사회를 은밀히 지배하고 있는 공포와 혐오와 분열의 영이 스러질 수 있으면 좋겠다. 빛이 그리운 시절이다. 그런데 시간의 주인이신 분은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름값을 하며 살고 싶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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