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층 재건축 조건부로..39년된 연탄아파트 '보존 대못질' 했다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2021. 11. 23.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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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개포주공4단지 재건축 현장에 가면 35층 신축 아파트 옆에 39년 된 5층 연탄 아파트가 '규제의 대못'으로 박혀 있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주택국장을 역임한 부동산 전문가인 정창수 가톨릭 관동대 석좌교수가 착잡한 표정으로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장세정 기자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4단지 철거 당시 모습. 2012년 박원순 시장 당시 서울시는 재건축을 허가해주는 조건으로 39년 된 5층 연탄 아파트 2개 동을 미래 유산이란 명분으로 보존하도록 규제를 가했다. [연합뉴스]

경기도 성남시 대장동 일대 개발을 둘러싸고 특정 세력이 1100배가 넘는 수천억 원의 개발 이익을 독점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서울 최초 민선 3선'이라고 자랑했던 박원순 전 시장 체제의 서울시에서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벌어졌다. 4·7 보궐 선거에서 오세훈 시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전임 시장의 실정이 하나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10년간 시민단체에 세금 1조원이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 외에도 도시와 주택 개발 관련 분야에서 누적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사대문 도심인 세운상가 일대와 강남 재건축 단지에서 벌어진 사례를 보자. 유산 보존이라는 명분을 내걸어 도시 기능을 왜곡하고 재건축 규제로 주택 공급을 축소한 '인치 행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서울 도심과 강남에서 10년 가까이 벌어진 이런 부동산 정책 왜곡과 실패는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와 결합하면서 '부동산 생지옥'을 연출했다. 마·용·성, 노·도·강, 금·관·구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비강남으로, 다시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부동산 광풍을 일으켰다.
오세훈 시장은 지난 18일 서울시의회에서 "8월 초쯤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서 종로2가와 청계천을 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10년 전 퇴임할 때 세웠던 계획대로만 실행했다면 서울 도심의 모습은 완전히 상전벽해가 됐을 것"이라며 "서울시민이 동의하는 형태로 종로·청계천·을지로·퇴계로의 미래를 향한 계획을 내년 상반기까지 다시 세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세운상가 일대에 조성 중인 공중 보행로에 대해 "(전임 시장 때 시작한) 공사가 70% 이상 진행돼 차마 중단시키진 못했지만 완성되면 도심 발전을 막는 또 하나의 대못이 될 것"이라며 "새로운 계획을 다시 세워도 10년 전 계획이 다시 완성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돼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박 전 시장 시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승효상 초대 서울시 총괄건축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보존 중심의 이상주의적인 건축관과 도시관을 갖고 서울시 도시계획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비판했다.

박원순 시장 시절 미래 유산이라고 보존한 서울 세운상가에서 동쪽 광장시장 쪽으로 바라본 도심이 황량하다. 장세정 기자

오 시장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세운상가에 가서 동서남북 방향을 내려다봤다. 여기가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빈민촌같이 황량했다. 1968년에 주상복합상가로 신축한 세운상가는 53년이 지나면서 거대한 콘크리트 폐기물과 다름없어 보였다. 세운상가 주변엔 흉물 같은 건물이 방치돼 유령도시에 온 것 같았다. 근처를 찾은 시민들은 "왜 서울 도심을 이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정비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새로 단장하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박 전 시장의 10년 시정이 남긴 대못은 세운상가 주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가면 유산 보존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내세운 대못 박기 행정의 증거물을 또 발견할 수 있다. 개포주공 1단지와 4단지 재건축 현장 말이다.
개포역에서 양재대로 방향으로 걸어가면 서쪽에는 개포주공3단지가 디에이치아너힐즈로 깔끔하게 재건축돼 있다. 하지만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쪽의 개포주공4단지는 규모가 커서 사업이 늦어지는 바람에 박 전 시장의 정책 실험 대상이 됐다. 2023년 2월까지 최고 35층, 35개 동(3375가구) 규모의 개포프레지던스자이 재건축 아파트를 짓는 부지 입구 쪽에 1982년에 지은 5층 아파트 2개 동(429동, 445동)이 버티고 있다. 한 주민은 "연탄 때며 고생하던 낡은 아파트를 남겨둘 이유가 있느냐. 정책 만든 사람들이 직접 와서 고생하며 살아봐야 한다"며 언성을 높였다. 인근 개포주공 2단지는 사업이 빨라 이런 황당한 규제를 피했지만, 규모가 큰 1단지에도 5층짜리 1개 동(15동)이 남아 있다.

박원순 시장 시절 39년된 5층 연탄 아파트 보존 규제를 받은 개포주공 4단지(오른쪽)와 규제를 피한 개포주공3단지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현장을 살펴보는 정창수 가톨릭 관동대 석좌교수. 장세정 기자

그렇다면 주민 대부분이 반대한 '연탄 아파트'가 대못처럼 남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서울시 관계자는 "2012년 9월 박 시장 당시 법과 조례 어디에도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지 말고 보존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었다. 다만 내부적으로 박 시장의 '근현대 유산의 미래 유산화 기본구상’에 따라 노후 아파트를 헐지 않고 일부를 남기면 우수디자인으로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재건축 정비계획안을 통과시켜줬다. 주민들은 반대했지만, 재건축을 해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서울시의 보존 방침을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주민들의 숙원인 재건축을 허가해주는 대신 박 시장의 뜻대로 연탄 아파트를 보존하게 됐다는 얘기다. 지자체가 단체장의 인허가권을 무기 삼아 주민들에게 '행정 갑질'을 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서초구 반포 주공1단지 1·2·4주구(108동)와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523동)에도 이런 인위적 규제가 적용될 예정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오른쪽)이 서울 관악구 신림1 재정비촉진구역을 방문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오 시장 취임 이후 완전 철거를 원하는 민원이 제기됨에 따라 주민 의사를 반영해 관련 계획을 수정해갈 예정이라고 한다.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주택국장을 역임한 정창수(64) 가톨릭 관동대 석좌교수를 개포동 현장에서 만났다.
-연탄 아파트 유산을 직접 본 소감은.
"실물은 처음 봤다. 유럽에서 시작된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엉터리로 적용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흉물스럽고 의미 없는 성냥갑 아파트를 유산이라고 남겨놓은 아이디어가 참 기가 막혔다."

-가뜩이나 강남엔 공급이 적은데.
"땅도 부족하고 공급 물량이 부족한데 이런 도시재생은 전시행정의 표본이다. 임대주택이라도 더 지어 20·30세대 청년이나 신혼부부가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게 훨씬 바람직한 정책이다."
-박 시장 시절에 재건축을 억제했다.
"그때 재건축을 원활하게 추진했더라면 지금보다 공급 물량이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박 시장 때 규제 때문에 재건축이 차질을 빚으면서 공급 물량 축소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을 야기시켜 집값을 자극했다."
-강남 잡으려다 전국에 부동산 광풍을 일으켰다.
"미국은 뉴욕 맨해튼, 일본은 도쿄 신주쿠에 고가 주거 단지가 있어도 그곳을 별도로 겨냥해서 집값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교육 여건 등이 작용해서 강남은 집값이 오르기 때문에 억지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시간이 걸려도 비정상적 입시제도를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문 정부도 부동산 실패를 인정했다.
"시장을 너무 우습게 봤다. 시장에 개입하면 집값 조정이 가능하다고 착각했다. 시장경제 원리에도 안 맞는 대책을 내놓으니 4년 내내 실패했다. 국민의 주거 행복권을 보장해주기는커녕 주거 고통을 가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 KBS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일상으로’에 참석해 환하게 웃고 있다. 문 대통령은 4년 6개월 재임 기간 동안 대한민국이

-여권은 아직도 '정부를 이기는 시장은 없다'고 고집한다.
"노태우 정부 시절 200만호 아파트 지을 때와 달리 지금은 주택이 2130만호를 넘을 정도로 시장이 어마하게 커졌다. 이 정도로 커진 시장을 정부와 공공부문이 건설부터 가격·금융·세제를 통제해 주택시장을 안정시킨다는 발상부터 난센스다. 시장에 맡기고 공공 부문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
-만약 지금 국토부 장관이라면.
"돌팔이 의사가 엉터리 진단을 하고 틀린 처방으로 상처를 칭칭 감아 손대기 어려운 상태다. 문제 진단을 정확히 못 하니까 계속 헛발질하며 상처를 악화시켰다. 삼국지에 나오는 명의 화타가 오더라도 1~2년 이상 국민이 참아주고 혼돈의 시기를 지혜롭게 넘기지 않으면 부동산 안정기로 연착륙하기 어려울 수 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규제를 풀어야 한다. 거래세와 보유세를 완화해야 한다. 추가부담금 합리화 등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풀어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 공권력을 이용해 쉽게 토지를 수용해서 베드타운 만들고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 소멸을 부추긴 LH는 해체 수준으로 개혁해야 한다."
-'집은 공공재이고, 땅은 국민의 것'이란 주장에 동의하나.
"말도 안 되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루마니아 사례처럼 공산주의 국가들은 그런 식으로 1가구 1주택 주장하다 주택 공급에 참담하게 실패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4년 6개월 재임 중에 가장 아쉬운 것으로 부동산 정책을 들었다. 2019년 11월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고 했던 문 대통령은 지난 5월엔 "부동산만큼은 정부가 할 말이 없다"고 하더니 이번엔 "아쉽다"고 했다.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넷플릭스 드라마 세계 1위에 오른 '지옥'의 한 장면. 문재인 정부 4년 6개월의 정책 실패로 지금 대한민국은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부동산 생지옥'이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사진 넷플릭스]

부동산 실패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를 '헬 조선'으로 밀어 넣고 있다. 지난 19일 넷플릭스에 출시되자마자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떠오른 신작 드라마 '지옥(Hell bound)'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부동산 지옥'은 신이 아니라 위정자의 실책으로 초래됐다. 그렇다면 정책 실패는 권선징악을 주재하는 신이 단죄할 일이 아니라 유권자인 사람이 표로 심판할 문제 아닌가.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최지혜 인턴기자가 현장 취재에 참여했습니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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