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53년생 이순자

이경희 2021. 11. 23.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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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1953년생 이순자는 62세에 취업전선으로 나섰다. 황혼이혼 이후 독립 생계를 위해서였다. 문예창작과 전공에 어린이집 운영 경력, 호스피스 봉사활동 20년 경력과 각종 상담치료 1급 자격증은 시청 구직창구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곱게 나이 드셨네. 혹시 청소나 단순 작업도 하실 수 있겠어요?
딱 중졸 학력까지만 남겨 이력서를 고쳐 쓴 뒤 투입된 일은 수건 접기. 4대가 사는 대가족 종갓집 맏며느리로 혼자서 300명 손님도 치른 그였으나 단순 반복 노동 앞에선 배겨내지 못했다. 심장병과 퇴행성 관절염에 골다공증까지 버무린 부실한 몸이라서다. 일주일을 못 채워 그만두니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버스비와 파스 값만 날렸다. 백화점 청소, 공사 중인 건물청소까지 뺑뺑이를 돈 끝에 청소엔 학을 떼고 어린이집 주방 선생님으로 방향을 틀었다. 적성을 찾은 듯했으나 다 삭은 쌀로 아이들 먹을 밥을 지으라는 원장의 지시를 받곤 그만뒀다. 어차피 한 달 30만원 보수로는 생계를 이을 수 없었다.

이후 65세까지 입주 돌보미, 장애인 활동 도우미,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갑질하는 보호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순간에도 요양보호사를 성추행하려는 남성 이용자까지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 53년생 이순자는 이를 기록한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지난여름 매일신문 실버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됐다.

매일신문에 게재된 이순자 작가 수상작 '실버 취준생 분투기'. 온라인 중앙일보에 접속중인 분들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작품 링크로 연결됩니다. 네이버 등 포털에서는 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작품명을 검색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매일신문 캡처]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놀라운 흡인력으로 최근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작가로 새 출발을 축하한다는 댓글 위에는 명복을 비는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지난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된 덕에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던 그는 시상식 한 달 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경제연구원은 2045년에는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37%에 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나라가 될 거라 전망한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43.4%(2018년)로 OECD 평균(15.7%)의 약 3배에 달해 압도적 1위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하는 노인 빈곤 국가가 우리의 미래다. 숫자만으론 체감하지 못하는 현실, 늙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세상을 기록하고 떠난 고 이순자 작가의 명복을 빈다.


참고 자료


'늙어가는 한국, 노후대책은 부실, 연금으로 생활비 절반도 빠듯'-한일 고령층 연금수령실태 조사, 한국경제연구원 보도자료(2021.11.15)
'2021 고령자 통계', 통계청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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