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워싱턴서 허 찔린 한국
워싱턴에서 일하면서 일본 외교의 힘을 실감할 때가 종종 있다. 세계 3위 경제 대국이란 존재감 덕도 있지만, 섬세하면서 꾸준한 접근 방식에 매료된 미국인도 꽤 많은 것 같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게 외교라면 일본은 지난주 워싱턴에서 한국의 허를 찔렀다.
한·미·일은 미국 주최로 외교 차관 협의를 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다. 동맹 중시를 모토로 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4년 만에 부활시킨 외교 행사인 만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은 성대한 회견을 준비했다. 정례 브리핑룸보다 열 배는 큰 ‘딘 애치슨’ 강당을 잡고, 3국 기자들을 초청했으며, 참석자를 포함한 일정을 전날 예고했다. 미국의 힘은 동맹에서 나온다고 믿는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적’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기회였다.
일본이 김창룡 한국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문제 삼으며 회견 불참을 미국에 통보하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일본 측 논리는 일본 기자들이 모리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에게 김 청장의 독도 방문에 관해 물으면 강경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 아예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차려놓은 밥상을 객(客)이 엎은 격이다. 한·일 갈등은 미국도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장면이면서, 동맹 복원에 주력하는 미국을 상대로 무리한 요구도 관철하는 설득의 힘을 봤다. 미국이 체면을 구기면서도 일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논리를 짰다는 촌평도 있다.
결국 셔먼 부장관은 나 홀로 회견을 택했다. 미국은 최종건 한국 외교부 1차관도 반박에 나서면 ‘동맹’ 대신 ‘독도’가 기자회견을 지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한국에 전하면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국에 선택지가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후속 조치로서 동맹 강화 노력, 북한 비핵화 입구로서의 종전선언 등 정부의 외교 전략을 미 언론에 소개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한·일 담장 밖으로 꺼내는 ‘성과’도 챙겼다. 워싱턴에서 미국 고위관료가 “한·일 간 이견”을 입에 올렸고, 외신은 “섬을 둘러싼 분쟁”(로이터) “다툼”(가디언) “승강이”(블룸버그) 때문에 기자회견이 불발됐다고 보도했다. 독도의 국제 분쟁화는 일본에 득이 되는 일이다.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는 고유 영토가 마치 영유권 분쟁지역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일본이 트집 잡고 꼼수 부리는 것, 맞다. 하지만 그에 말려들지 않는 것은 한국 책임이다. 한·미·일 협의 하루 전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이 낳을 후과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무능하거나 순진하거나 안이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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