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돌봄이 '늪'인 사회

조민영 2021. 11. 22.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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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수술을 받느라 한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병동 다인실에 입원한 엄마 곁을 잠시 지켰다.

그 병실에서 엄마는 매우 양호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유일한 환자였다.

복지 당국은 경제적 취약계층인 그가 긴급복지지원제도나 기초생활수급 등의 지원을 받을 길이 있었는데 신청하지 못한 지점을 안타까워했다.

돌봄 자체를 누군가와 나눠서 지지 못하는 한 그가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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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갑작스레 수술을 받느라 한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병동 다인실에 입원한 엄마 곁을 잠시 지켰다. 그 병실에서 엄마는 매우 양호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유일한 환자였다.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우리 귀에 주변 병상의 환자와 보호자 혹은 간병인의 이야기나 상황은 계속해 들려왔다. 엄마는 자꾸 그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자꾸 남 얘기를 하느냐고 엄마에게 핀잔을 줬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어떤 부작용이 올지 모르는 수술을 앞둔 엄마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두려움으로 작용했다. 나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것, 그래서 자식의 발목을 잡거나 어깨에 지워질 짐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됐고 누군가 전적으로 붙어 간병한 기간은 일주일 남짓으로 끝났다. 엄마는 누군가의 짐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두려움의 경험은 착잡함으로 남았다.

간병이라는 돌봄의 무게를 가늠해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돌봄은 절대적으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물리적 시간과 동행을 전제로 한다. 누구나 받아본 대표적 돌봄은 육아다. 아이가 태어나면 젖먹이 때는 물론 어느 정도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누군가는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한다. 어린이집 등에 가도 돌봄 인력이 없으면 위기는 상시적이다. 아픈 성인을 돌보는 간병은 더욱 그렇다. 아이는 성장하기에, 육아 돌봄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다. 반면 아픈 성인이나 고령자를 돌보는 일은 미래가 불확실하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고, 좋아질 가능성보다 나빠질 가능성이 더 큰 경우가 많다. 만약 그 부담을 나눌 다른 이가 없다면, 몸이 완전히 묶여 생활 자체를 이어가기 어려워진다. 돌봄 제공자의 삶 자체가 발목 잡히는 것이다.

아버지 살해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22살 대구 청년의 사연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 것은 그래서다. 더구나 그에겐 도움을 구할 곳은 물론 문제를 의논할 다른 가족도 이웃도 없었다. 누구를 돌보는 경험을 해보기는커녕 이제 겨우 미성년 딱지를 뗀, 자신의 삶도 아직 제대로 책임져볼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나 혼자 설 힘도 갖추지 못한 이가 철저히 의존적인 다른 삶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견뎌 서 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복지 당국은 경제적 취약계층인 그가 긴급복지지원제도나 기초생활수급 등의 지원을 받을 길이 있었는데 신청하지 못한 지점을 안타까워했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런 사건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여러 복지제도가 있었음에도 5년 내에 지자체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늪에 빠진 이는 스스로 나올 수 없다. 애초에 빠지지 않도록 밖에서 손을 잡고 있어줘야 하고, 빠졌을 땐 더 많은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당겨야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설사 그가 제도를 잘 알아 여러 지원을 받았더라도 획기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미지수다. 몸과 삶이 메어야만 지속 가능한 돌봄의 속성 때문이다. 돌봄 자체를 누군가와 나눠서 지지 못하는 한 그가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돌봄은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인생 자체가 태어나면서부터 돌봄을 받다, 다시 돌봄을 제공하고, 또 돌봄을 받게 되는 연속인 셈이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고, 해결되지 않을 경우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면 돌봄은 생존권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미 사회적 기본권의 문제다. 개인이 짊어지기에 너무 무거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나눠 질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공정한 세상도, 기회의 세상도 그런 기본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공허한 얘기 아니겠는가.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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