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어떤 취재기

조효석,문화체육부 2021. 11. 22.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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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석 문화체육부 기자


몇 주간을 되물으며 기다렸다. 결국 모두 거절이 돌아왔다. 이번 시즌 개막 전 프로배구 구단에 연맹을 통해 전달했던 표준계약서 관련 인터뷰 요청이었다. 총 7개 중 4개 구단에, 최대한 구단의 입장을 배려하며 절차를 밟아 신중히 진행한다고 했는데도 반응이 하나같이 차가웠다. 더 조심스럽게 요청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과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처음부터 안이했다는 자책도 함께 따라왔다. 이 글은 부끄러운 실패담이다.

시즌 개막 직전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이 일본 도쿄에서 치른 명승부 덕에 배구계는 들떠 있었다. ‘여제’ 김연경이 떠났지만 흥행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와 함께한 동료들이 모두 국내 코트 위에 남아 있어서였다. 마침 때를 맞춰 정부에서도 슬슬 프로 종목 관중 입장 허용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지인 중 스포츠에 관심 없이 살아왔다던 학교 후배는 여자배구에 ‘입덕’했다며 시즌이 개막하면 꼭 경기장에 가겠다고 했다. 훈풍은 이미 불고 있었다.

불과 1년여 전 분위기는 달랐다. 지난해 7월 프로배구 선수 고유민이 25세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직전 소속팀 현대건설이 자신과 계약을 해지한 뒤 임의탈퇴 신분으로 묶어 버리며 사실상 선수 생활을 강제 중단시킨 게 죽음을 택한 이유였다.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 유서는 자책으로 끝나 있었다. 유족이 구단주를 고소·고발했으나 검찰은 결국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파장은 컸다. 사건이 논의를 촉발하고서 약 11개월 뒤인 지난 6월 문화체육관광부는 프로스포츠 종목별 표준계약서를 고시했다. 고유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임의탈퇴 제도 폐지는 그중 핵심이었다. 새 표준계약서는 기존 임의탈퇴 제도의 이름을 ‘임의해지’로 바꾸고, 적용되더라도 선수 동의가 없었음을 증명하면 즉각 효력을 없애도록 했다. 선수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본래 취지를 살리려는 의도다. 그간 모든 프로 종목 중 배구 구단은 가장 빈번히 임의탈퇴를 징계 용도로 활용해왔다. 새 표준계약서가 가장 먼저 적용되는 것도 프로배구다.

중요한 이슈라는 생각에 좀 크게 다뤄야 하지 않을까 했다. 새 표준계약서를 다듬어낸 문체부 실무자와 법무법인 변호사들을 함께 만나 대담 기사를 썼다. 이견 조율의 지난함과 법적 한계를 견디며 새 계약서를 쓴 이들의 수고가 느껴졌다. 다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약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의 당사자인 선수들이 계약서에 적힌 자신의 권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또 그걸 어떻게 활용하는 줄 아는지 여부가 핵심이었다.

계약서는 법적 문서다. 선수가 아닌 일반인도 계약과 관련해 법적 권리를 스스로 따지긴 쉽지 않다. 하물며 평생을 엘리트 체육만 하며 살아온, 사회 기준으로는 초년생 정도 나이에 불과한 대다수 프로선수가 계약서상 유불리를 온전히 이해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선수를 대변할 에이전트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가 일반화된 야구와 축구를 제외하면 다른 종목 선수에게는 에이전트가 드물다. 문체부가 이런 사각을 의식해 지난 8월 표준계약서 해설서를 내놨지만 역시 선수들이 읽기에 그리 쉽지는 않았다.

프로배구 구단에 표준계약서와 관련한 간판선수 인터뷰를, 그것도 연맹을 거쳐 요청한 건 그래서였다. 적어도 한 군데 정도는 응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중요한 사건의 당사자였던 만큼, 또 표준계약서를 가장 먼저 시행하는 종목인 만큼 선수와 팬들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명할 의무와 책임, 수치심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올림픽 스타이자 각 구단의 대표격인 선수들이 직접 나서 자신의 권리에 대해 얘기할 자리가 마련된다면, 고인도 어쩌면 자신의 죽음이 그리 헛되지 않았다 여길까 싶었다. 어쩌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나 보다. 고인에게 다시 죄를 지었다.

조효석 문화체육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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