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의 문화스케치] 질문하는 아이들

2021. 11. 2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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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부산에 다녀왔다. 주최 측에서는 ‘일상 회복’을 주제로 인문학 강연을 요청해왔다. 축제는 공연과 강연과 체험 등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위드 코로나’ 이후 현장에서 드디어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행사가 진행된 곳은 감만동이었다. 어디를 가든, 가는 곳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가려고 하는 편이다. 검색을 통해 해당 지역에 대해 파악하고 나면 마음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지는 것도 같다. ‘사람 사는 곳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란 질문으로 바뀐다.

가보지 않은 장소를 상상할 때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지도를 그리는 기분이 든다. 부산이니까 바다가 있겠지? 감만동이라니, 혹시 ‘달 감(甘)’ 자에 ‘찰 만(滿)’ 자를 쓸까? 달콤한 것들이 가득한 동네라는 의미일까? 찾아보니 ‘감만(蠻戡)’은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항구와 인접한 동네겠네! 상상은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 집을 세우고 도로를 닦고 항구를 건설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머릿속으로 그린 지도가 실제 방문한 곳과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나는 그 불일치가 좋다. 그래서 내게 어디론가 향하는 일은 상상과 경험을 만나게 하는 일이다.

내가 찾은 일요일에는 행사장이 북적였다. 모든 행사는 단위 면적당 인원 기준에 정확히 맞추어 진행되었는데, 당연히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도 길었다. 가족 단위가 많다는 얘기를 사전에 듣지 못해서 적잖이 부담되었다. 강연할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눈을 맞추는 일인데, 아이들이 있으면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시종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대와 멀찌감치 떨어져 마음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강연 전에 펼쳐진 무대는 마술쇼였다. 시작부터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스크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탄성에 무대 뒤편에 있는 나조차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대는 놀랍고 신기한 마술을 선보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차력쇼로 장내는 일순 뜨거워졌다. 아이들의 돌고래 소리는 그간의 숨 막히는 시기를 뚫고 나오는 것이었다. 보고 싶었으나 현장에 발 들이면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았다. 마술쇼와 차력쇼가 끝난 현장은 흡사 거대한 잿더미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열정을 다 태우고 남은 자리에는 미련만이 가득했다.

내 차례였다. 이미 축제의 절정이 끝났음을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객석으로 활용된 잔디밭에는 쇼의 여운이 가득했다. “체력이 국력이 아니야, 차력이 국력이지.” 심드렁하게 혼잣말을 하며 무대에 올랐다. 인사를 했으나 나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감만동에 조금 일찍 와서 동네 산책을 했던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을 위해 따로 준비한 슬라이드가 있었으나, 야외에서 화면이 깨끗하게 보일 리 만무했으므로 보여주기가 아닌 들려주기에 힘을 실었다.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잔디밭을 떠났던 이들이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 동네에 와서 보았던 것이 그들에게 앞으로 볼 것이 되기도 했다. 너무 익숙한 것들은 으레 지나치게 마련이다. 그것을 붙드는 일이,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가져다주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던 참이었다. “틈이 날 땐 무엇을 하세요?” 특별히 대답을 요구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는 그림책을 봐요!”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저는 게임을 해요!”라고 응수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현장에서 가장 열정적인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었다. 편견이 산산이 깨졌다.

“차력쇼 다음에 하는 행사는 정말이지 사력을 다해야겠어요.” 내 말에 가장 크게 웃어주는 것도 아이들이었다. 강연이 끝난 후, 한 아이가 물었다. “입고 있는 바지 색깔이 뭐예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당황한 채로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캐러멜 색깔 같기도 하고 캐멀 색깔 같기도 한, 암갈색 바지였다. “색깔 이름을 지어줄래요?” 내 요청에 아이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가 마시는 커피 색깔로 할래요!”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웃었다.

지난 주말, 부산에서 질문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모르면 몰라도, 질문하는 사람이 답을 찾을 것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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