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주의 밥상+머리] 존칭의 이유

2021. 11. 2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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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유튜브에 업로드된 3분18초 분량의 영상 하나가 조회 수 840만 회를 넘기며 인기몰이를 했다.

예로부터 하늘에서 비나 눈이 오시기는 했지만, 중화제가 흐르신다고 말하는 사회란 그 얼마나 예의 바른가? 가만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를 점령한 사물존칭어법은 이런 광고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통찰력 있는 광고인들과 마케팅 담당자들이 이 사회의 언어습관과 소비자 심리를 꿰뚫은 결과, 아예 식품들을 의인화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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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유튜브에 업로드된 3분18초 분량의 영상 하나가 조회 수 840만 회를 넘기며 인기몰이를 했다. 삼양식품이 창립 60주년을 맞아 뮤지컬 형식의 광고를 올린 것인데, ‘고퀄’의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주인공 목소리 역을 맡아 노래를 한 이는 슈퍼주니어 규현. 스토리도 재미있다. 양의 얼굴을 한 삼양라면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난 무난한 게 익숙해. 60년 동안 그저 쉽게 끓여진 라면’이라고 자조하듯 노래한다. ‘빠르게 변해만 가는 세상에서 진정 난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고 묻는 장면은 우습지만, 어라, 제법 공감이 간다. 순간 광고에 확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불닭면 등 자극적인 라면이 트렌드가 된 세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평범하게, 위대하게’ 기본을 지켜가겠다는 이야기.

요즘 식품 유통업계에서는 광고에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 대세다. 작년 초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 왕자는 빙그레왕국뿐 아니라 광고계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창립 53주년을 맞은 빙그레의 마케팅은 크게 성공했다. 출시 65주년을 맞은 대상의 미원은 ‘65년째 감칠맛 내는 조연’이라는 테마로 유튜브 광고를 공개해 역시 대박을 쳤다. 배우 김지석씨가 남녀 주인공의 연애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미원 역을 맡았다. 흥행에 성공한 선례에 힘입어 기업들은 계속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장수기업들이 MZ세대 눈높이에 맞춰 제품을 의인화하고 독창적인 세계관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트렌드가 된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미용실에 가서 펌을 했는데, 마지막 단계로 머리에 중화제를 발라주며 헤어 디자이너분이 물었다. “흐르시는 느낌 받으시는 거 없으시죠?” 아, 중화제가 흐르시는 시대. 예로부터 하늘에서 비나 눈이 오시기는 했지만, 중화제가 흐르신다고 말하는 사회란 그 얼마나 예의 바른가? 가만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를 점령한 사물존칭어법은 이런 광고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통찰력 있는 광고인들과 마케팅 담당자들이 이 사회의 언어습관과 소비자 심리를 꿰뚫은 결과, 아예 식품들을 의인화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메타버스에서는 모든 브랜드가 의인화되고, 그 영향으로 현실 세계에서도 사물에 대한 극존칭이 소셜 매너로 확고히 정립되어 버리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예를 들면 이렇게. “라면 불으십니다.” “우유가 지금 뱃속으로 흘러가십니다.”

오늘은 이런 ‘웃픈’ 상상을 하며 밥상을 차리느라 나도 오랜만에 라면 봉지를 뜯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별도의 레시피가 없다. 라면은 봉지에 쓰인 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지만, 인스턴트를 그대로 먹는 것은 라면에 대한 예의일지언정 내게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아서, 표고버섯과 팽이버섯, 계란과 쪽파를 추가했다. 팔팔 끓는 물 속에서 라면이 거센 물결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던져 잘 익는 동안 나는 접시 하나를 들고 냉장고를 연다. 자, 이제 김치 나오십니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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