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년 삶 47년.. 김수영, 흔적을 더듬다

김남중 2021. 11. 1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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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길 위의 김수영
홍기원 지음, 삼인, 400쪽, 2만2000원
1968년 4월 13일 부산에서 열린 국제신보와 펜클럽 주관 문학 세미나 장면. 왼쪽부터 김수영 이헌구 백철 안수길이다. 이 자리에서 김수영은 그 유명한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를 발표했다. 삼인 제공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나타나는 ‘버거킹 종로점’ 앞에는 ‘김수영 생가 터’ 표지석이 박혀 있다. 김수영 시인은 이 자리에 있던 할아버지 집에서 1921년 11월 27일 태어났다.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12일에는 시인 고은 신경림 이시영, 소설가 황석영, 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유종호 등 63명이 발기한 김수영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정희성 시인은 이날 “기념사업회 발족은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기보다는 앞으로 새로운 100년을 계획하자는 뜻”이라며 “김수영 문학은 너무도 젊고, 그 젊음은 앞으로 100년이 가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판사 삼인은 김수영 관련 도서 두 권을 출간한다. 김수영문학관 운영위원장인 홍기원씨가 쓴 ‘길 위의 김수영’이 최근 나왔다.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의 ‘김수영, 시로 쓴 자서전’도 곧 나온다.


‘길 위의 김수영’은 김수영의 흔적이 묻어있는 장소 64곳을 통해 김수영의 삶과 문학을 보여준다. 서울 동대문 밖에 있는 동묘는 김수영이 소년 시절 어른들을 따라 명절 때마다 참배하던 곳이다. 김수영은 이 동묘의 이미지를 살려 ‘묘정의 노래’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1946년 ‘예술부락’에 실리면서 등단한다. 공교로운 것은 김수영은 모더니스트로서 평생 전통주의라고 이름 붙일 만한 시를 쓴 적이 없는데, 이 시가 유일한 예외였다는 점이다.

책은 출생부터 사망까지 김수영의 생애를 따라가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종로6가 집, 부인 김현경 여사를 처음 만난 진명여고,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선린상업학교·연희전문학교 등 그가 다닌 학교들, 청년 시절 연극을 하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친구인 박인환 시인이 운영한 명동 서점 ‘마리서사’, 성북구 돈암동 신혼집, 의용군으로 6·25전쟁에 끌려갔다가 포로 생활을 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현대문학사 신구문화사 창작과비평사 등 그가 드나들던 출판사들….

‘김수영의 장소들’은 서울이 중심이지만 부산 화성 경주 강릉 군산 그리고 북한 만주 일본에도 있다. 그 장소들을 거쳐 가며, 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군사독재 시절을 통과하며 김수영의 문학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조밀하게 그려낸다.

김수영의 시인으로서 삶은 해방 후 등단해서 1968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20년이 조금 넘는다. 그 사이 6·25전쟁이 있었고 포로 생활도 했으므로 실제 그가 문학에 정진한 시간은 10여년에 불과하다. 특히 늦은 밤길을 건너다 좌석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년이 김수영 문학의 절정기였다. 책 뒷부분은 이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좌에도 우에도 기울지 않았던 김수영은 1960년 4·19혁명을 거치며 현실참여 시인으로 거듭난다. 그는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라고 말했고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 정책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지금 읽어도 김수영의 글은 낡아 보이지 않는다. 유종호 시인의 말대로 김수영의 문학은 너무나 젊다.

68년 벽두를 장식한, 김수영과 이어령의 ‘문학의 사회참여’ 논쟁 직후인 3월 김수영과 가족들은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하지만 김수영은 4월 부산 국제신보와 펜클럽에서 주관하는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그 유명한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를 발표한다.

여기서 김수영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우리나라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고 있을 문장을 토해낸다.

김수영 후배인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그가 문단을 넘어 지식인 사회 전체의 주목을 받은 건 조선일보에서 이어령씨하고 논쟁을 해서인데, 그때가 김수영 정신의 절정기였다”며 “그 무렵 부산에서 강연한 ‘시여, 침을 뱉어라’는 우리나라 문학사상 가장 탁월한 문건”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속 건물은 당시 문학 세미나가 열린 미화당백화점이다. 삼인 제공


김수영이 ‘시여, 침을 뱉어라’를 발표한 미화당백화점은 현재 부산 지하철 1호선 남포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광복로 패션거리의 삼거리 모퉁이에 있었다. 현재는 ‘ABC마트 GS 부산 광복점’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건물은 겉화장만 좀 바뀌었을 뿐 속은 그대로”라며 “김수영이 ‘온몸의 시론’을 불같이 발표했던 옛 미화당백화점 건물이 오래 살아남기를 기원한다”고 썼다.

김수영의 행적을 좇아가는 저자는 김수영다움의 핵심을 솔직함이라고 본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박인환 추모 글에서 김수영은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김수영은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거나 부자 의사인 누이 남편의 재력에 주눅이 들었다는 얘기를 글로 썼다. 육체적 욕망, 부끄러움, 열등감 같은 것들을 감추지 않았다. 저자는 “김수영은 마음에 없는 글쓰기를 못 했다”며 “100퍼센트 진실한 글”이 김수영의 마력이라고 했다.

김수영은 생전보다 사후에 더 인기를 누렸다. 김수영이 살아서 낸 시집은 1959년 ‘달나라의 장난’이 유일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민음사가 ‘오늘의 시인’ 총서를 시작하며 첫 시선집으로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출간했고, 이 시집이 3만부나 팔렸다. 70년대는 그야말로 김수영의 시대였다.

저자는 김수영의 작품과 일기, 지금까지 발표된 김수영 관련 기록들에 현장 답사와 문단 원로들의 인터뷰를 덧붙여 김수영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는 데 신경을 썼다. 특히 발언을 삼가왔던 김수영 가족들의 증언을 이끌어내 원고의 상당 부분을 채웠다. 이를 통해 김수영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고 오해를 풀고자 했다.

1961년 촬영한 김수영 가족 사진으로 오른쪽부터 김수영, 큰누이 김수명, 어머니, 부인 김현경이다. 삼인 제공


시 ‘죄와 벌’에 대한 비난도 언급한다. 거리에서 우산으로 부인을 폭행한 내용을 담은 이 시는 반여성적이란 질타를 받고 있다. 저자는 포로수용소를 극적으로 벗어나 부인·아들과 재회를 간절히 바랐는데, 부인이 아들을 친정에 맡긴 채 자신의 선배와 동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당시 김수영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수영이 사용한 ‘억만 개의 모욕’이란 시어를 인용해 “이 ‘억만 개의 모욕’ 화살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야 했던 김수영의 심적 기저를 이해해야만 시 ‘죄와 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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