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날엔..] 檢, 대선 앞두고 DJ수사 중단..신한국당 分黨 위기

류정민 2021. 11. 1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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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21일 검찰총장, 김대중 野 대선후보 수사중단 발표
이회창 與 대선후보 반발, 김영삼 대통령 탈당 요구 정국 격랑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편집자주 -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1997년 10월21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의혹사건 수사 중단을 발표하는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 [KBS 9시뉴스 보도 화면]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극심한 국론분열, 경제회생의 어려움과 국가전체의 대혼란이 분명하다고 보여지고….”

1997년 10월21일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의혹사건과 관련해 “검찰은 이 수사를 15대 대선 후로 유보한다”고 밝혔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 앞둔 상황에서 검찰의 제1야당 대선 후보 수사 중단 소식은 법조계는 물론이고 정치권에 폭풍우로 다가왔다. ‘법조 문법’과 ‘정치 문법’을 흔든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총장이 제1야당 대선주자 수사 중단을 발표한 것은 그 자체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다. 검찰총장 단독으로 그런 판단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검찰은 독자적인 결단이었다고 밝혔지만 정가의 시선은 청와대로 향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여당(신한국당) 이회창 총재에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결정을 묵인 또는 방조한 이유를 놓고 궁금증이 증폭됐다.

자료사진 /문호남 기자 munonam@

대선을 앞두고 여야 대선후보와 관련한 검찰 수사는 한국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정치권에서는 검찰의 정치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반면 법치주의에 성역은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97년 대선이 흥미로운 이유는 검찰총장이 제1야당 대선주자 수사 중단 결정을 내리면서 정치적으로 ‘날개’를 달아줬다는 점이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1997년 대선 구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 총재는 정치인 김종필, 정치인 박태준과 함께 DJP 연합을 결성해 대선을 준비했다. 신한국당은 정치인 이회창을 앞세워 대권을 잡는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다.

신한국당은 대선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1997년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번도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 조직과 자금, 모든 면에서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이 유리했다.

문제는 현직 대통령(YS)과 차기 권력(이회창)의 균열이 감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권 내부에서는 주류vs비주류의 갈등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김태정 검찰총장의 전격적인 발표가 나왔다.

당연히 이회창 총재 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었다. 이회창 총재는 1997년 10월2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를 포함해 검찰 수사를 재개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신한국당 명예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다.

‘정치 9단’ 김영삼 대통령은 그런 상황을 예견한 것일까. 대선후보 연쇄 회동을 통해 정국 타개를 시도했다. 1997년 10월24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가 만났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나는 누가 반드시 대통령이 돼야 한다거나,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정치 중립 선언, 당연한 주장인 것 같지만 여당 대선후보 입장에서는 속이 쓰린 내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당시 메시지는 이회창 총재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김대중 총재에 대한 보수층의 불안 심리를 완화하는 정치적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전개됐던 청와대와 여당의 정치 소용돌이는 대선 막판까지 이어졌다.

대선을 앞두고 조성된 유리한 정치적 환경, 그런 흐름을 토대로 김대중 총재는 여유 있게 대선에서 승리했을까.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대선 출마가 없었다면 1997년 대선 승자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회창 후보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꿔서 대선에 출마했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1997년 12월 대선에서 1032만6275표(득표율 40.27%)를 얻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993만5718표(득표율 38.74%)를 얻었다.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표 차이는 39만557표에 불과했다.

이회창 후보와 정치적 지지 기반이 겹친다는 평가를 받았던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492만5591표를 얻으며 선전했다. 이인제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면 1997년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 이유다.

1997년 대선은 여러 의미에서 한국 정치사의 연구 대상이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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