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선] '정책의 시간'을 기다리며 2

서경호 2021. 11. 1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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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선거판에서 정책 토론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지난번 칼럼(‘정책의 시간’을 기다리며)을 썼다. 보수도 맞장구칠 만한 진보경제학자의 정책 제언을 여럿 소개했다. 이들 경제학자 11인의 공저 『정책의 시간』에는 공감하는 대목이 많았지만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일부 있었다. 관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좀 불편했다.

“우리나라의 관료는 과거 보수적 정부의 정책 기조와 정부 주도적인 정부-시장 관계 속에서 훈련되고 조직화한 집단이다. 더구나 지금은 국내외에서 경제구조의 대전환이 나타나고 있는 시기여서, 과거의 관념과 관행에 익숙한 관료 집단이 조직적으로 학습된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응할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원승연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

「 관료냐 학자냐 따질 필요 없어
일 잘하는 사람이면 기용해야
홍 부총리 뒷모습 아름답기를

원 교수의 대안을 요약하면 이렇다. ‘새로운 정책, 개혁 정책, 진보 정책을 관료에게 의존해서 수립하고 집행하려고 하지 말자.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인들이 관료를 제대로 통제해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를 기대하지도 말자. 전환의 시대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외부 전문가 그룹이 개혁적 경제정책의 생산과 집행에 집단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글쎄다. 관료도 관료 나름이고, 학자도 학자 나름이다. 일단 정권이 바뀌면 실력은 없어도 정치색이나 지역만 보고 장·차관 자리에 중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용적인 인사도 꽤 있었다. 일 잘하는 관료는 진보, 보수 정권을 넘나들며 인정받았다. 제대로 된 실력 있는 관료들은 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대의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경제적인 합리성과 효율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학자도 마찬가지다. 실력과 리더십, 소통 능력으로 조직을 장악하고 성과를 낸 이들도 있었지만, 관료사회와 내내 불화하고 겉돌기만 하다가 행사에 쫓기고 사진만 찍다 간 분도 적지 않다. 지금 정부에 참여했던 학자 출신의 외부 전문가들을 떠올려 보면, 전체적으로 후한 평가가 나오긴 힘들다.

관료든 학자든, 일 잘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선거 국면에서는 정치판에 휘둘리지 않고 할 말은 하는 관료가 있으면 더 좋겠다. 그래야 무리한 공약을 버젓이 내놓고 표 계산만 하는 구태가 반복되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정책 토론이 살아나고 사회 공론장도 건강하게 형성된다.

여당 정치권의 이런저런 요구에 무력하게 밀리기만 했던 기획재정부가 모처럼 제 목소리를 냈다. 올해 거둘 세금 일부를 내년으로 미뤄 대선 전에 국민에게 뿌리겠다는 여당의 포퓰리즘에 기재부가 반기를 들었다. 국세청이 납부 유예를 해줄 수 있는 요건은 재난이나 도산 등으로 국세징수법에 정해져 있어서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거다. 물론 야당 대선 후보가 주장했던 50조원의 자영업자 손실보상에 대해서도 정말 필요한지, 재원이 가능한지 짚어보고 할 얘기라고 거리를 뒀다.

언론도 진보와 보수를 떠나 한목소리로 여야의 재난지원금과 손실보상 선거공약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납부 유예라는 전례 없는 편법으로 국세 제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세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법적 안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미래세대인 청년에게 빚을 떠넘기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야당이 보상범위나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고 50조원 보상을 내건 것도 무책임하다. 여야의 빚잔치 대선 놀음에 눈감고 침묵하는 건 제대로 된 언론이 갈 길이 아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달 유류세 인하를 무슨 전격전(電擊戰) 치르듯 신속하게 결정했다. 언론에 유류세 인하 검토가 보도된 지 2~3일 만에 국회 국정감사 자리에서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논쟁적인 유류세 인하를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인 예를 알지 못한다. 전통적인 재정건전성이란 굴레를 화끈하게 벗어던진 문재인 정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돈 쓰는 것 말고도 경제부총리 앞에 남아있는 의미 있는 과제가 적지 않다. 그는 이미 최장수 기재부 장관으로 기록됐다. 돌출변수만 없다면 현 정부의 마지막 경제부총리도 그가 될 것이다.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여야의 선거판 포퓰리즘에 맞서는 나라 곳간지기의 의연한 모습을 마지막에는 좀 보여줬으면 한다. 경제부총리의 결기를 보이는 듯하다가 막판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반복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번에 정말 그리만 된다면 ‘떠나는 사람의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국민과 기재부 후배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나는 무슨 도지사 자리보다 그게 100배는 더 영예롭다고 본다.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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