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탄소섬유로 맨홀 뚜껑도 못 만드는 나라

2021. 11. 1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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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전무 경제조사본부장

우리는 미래를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지금 행복한 이들은 계속 행복하고, 지금 불행한 이들도 더는 불행하지 않게 되는 사회’를 다들 얘기한다. 하지만 과연 필요충분조건을 따져보고 그 길로 맞게 가고 있는 것일까. 한 세대의 성공에 취한 채 미래설계에 소홀해 침체의 늪에 빠진 일본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우리는 경제 성과를 재원 삼아 사회안전망 확충에 박차를 가해 왔다. 기업들도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며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을 추진하고 있다. 바야흐로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에 이어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지속가능 발전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 경제역량 옥죄는 규제혁파 절실
대선 계기로 제도개혁 논의해야

문제는 목표 달성에 필요한 국가 역량, 특히 경제 역량이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중장기 하향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잠재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 상태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진입하면서 이제 메이저 리그 최강자들과 진검 승부를 펼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제조업 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 이겨야 하는 시련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려면 경제역량 강화를 국가발전의 필요조건으로 인식하고, 해법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이 낡은 법 제도를 혁파하는 일이다. 현행 법 제도의 근간은 일본식 포지티브형 규제 법제로서 경제 주체들은 법령상 허용된 일만 할 수 있다. 수십 년 전의 기술과 시장여건에 맞게 설계된 제도라서 많이 낡았지만 땜질식 수리에 그치고 있다. 해외에선 파괴적 혁신이 봇물 터지는데 우리는 법제도 장벽 때문에 좋은 아이디어가 사장되거나, 타다 서비스처럼 좌초되고 있다.

법 제도를 지키는 것은 경제·사회 패러다임이 격변하는 시기에는 미덕이 아니다. 바뀐 계절에 맞게 옷을 갈아입듯이 개혁이 당연하다. 예컨대 사람을 대신해 로봇과 드론이 일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법령상 얼마나 가능할지 따져보자. 로봇순찰은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안되고, 도어투도어(door to door) 드론 배송은 우편법 때문에 안되고, 자율주행 배달은 도로교통법 때문에 안된다.

건설현장에서의 중장비로봇 활용은 건설기계관리법에 막혀서, 디지털 트윈 방식 안전검사도 산업안전법에 막혀서, 자율주행 선박도 선박직원법에 막혀서 안 된다. 선박이나 맨홀 뚜껑을 탄소섬유로 만들면 철 재질이 아니라 안된다 한다. 의사가 환자맞춤형 인공혈관을 주문 제작하려 하면 형식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고, 청년 1인 가구를 위해 공유주택을 지으려 하면 개인주택이나 공동주택 형태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모두 사람의 활동을 전제로 설계됐고, 당시의 기술과 소재에 적합하게 규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낡은 사례들이 법제도 전반에 허다하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시행돼 규제 애로 사업에도 물꼬가 트인 점은 다행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도 민간 접수창구를 개설해 114건의 처리를 도와줬다. 다만 규제 샌드박스는 한양도성 사대문에 각각 수문장을 세워놓고 심의를 거쳐 하나하나 임시로 통과시켜 주는 셈이라서 차선책일 수밖에 없다. 올림픽에서 타국 선수가 출발할 때 우리 선수는 건강검진 결과 제출 및 감독 승인 절차를 거치는 격인데 그런 핸디캡을 없애주는 것이 맞지 않겠나 싶다.

1980년대 미국은 제조업 왕좌를 일본에 내줬지만, 인터넷 등 파괴적 혁신을 통해 부활했다. 이런 경제 재도약의 원동력을 얼마나 만들어내는가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우리 안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가 새로운 것에 활발하게 도전하는 환경을 조성할 때다.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국가의 미래와 구성원의 행복, 그리고 낡은 법 제도의 개혁이 충분히 논의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전무·경제조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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