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사전예약과 오픈런, 웨이팅과 프리오더의 시대. 내가 느끼는 소소한 패배감을 지우는 법

이마루 2021. 11.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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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안타깝고 속상할 때를 위해 내 좌절감과 패배감을 아껴두기!

가짜 패배감 피해가기

리움미술관이 재개관했다. 코로나19로 문 닫은 지 1년 7개월 만의 개관으로, 기획 전시가 열리는 건 4년 만이다. 론 뮤익의 거대한 두상 조각과 이브 클라인의 푸른색을 현장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2주 뒤까지 사전 예약이 마감된 상태. 팬데믹 시대에 자주 접하는 상황이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사람들은 국내의 좋다는 곳으로 몰리고, 거리 두기를 위해 실시하는 출입 인원 제한은 좁은 문을 더 좁게 만든다. 온갖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도 마찬가지고, 서울공예박물관이나 이미 시작된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예약을 받고 있어 아직 못 가봤다. 검색하면 다양한 블로그에서 ‘예약 꿀팁’을 전수해 주기는 한다.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미리 회원 가입해서 로그인해 두고 기다리다가 밤 12시에 2주 뒤 날짜 예약을 오픈할 때에 맞춰 경쟁이 덜할 것 같은 시간대를 재빨리 클릭하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달에 한 번 예약 일정을 오픈하는 지방의 멋진 숙소들도 대개 예약 시스템이 열렸다가 곧바로 마감된다.

사전 예약, 오픈 런, 웨이팅, 프리 오더…. 럭셔리 브랜드 제품부터 빵이나 디저트, 브랜드 굿즈나 MD, 전시와 숙박까지 ‘핫’하고 ‘힙’하다는 것들은 점점 접근이 어려워진다. 꿀팁이나 빠른 손, 줄 서서 기다리는 인내만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분야도 있다. 뉴욕에 사는 지인은 몇 년 만에 고국에 왔다가 서울 미식 신의 높아진 벽을 실감했다고 한다. 인기 있다는 스시야들은 이미 몇 달 치 예약이 차 있었고, 혹시나 1~2주 후에 날짜가 비어 있나 문의했다가 무례하거나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서울의 치열한 ‘스강 신청’ 경쟁에 놀랐다는 말을 들으며 나 역시 일찌감치 방문을 포기한 레스토랑 몇 군데가 떠올랐다. 대기표를 발행하거나 워크인으로 기다리면 되는 곳들은 차라리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자비롭다. 주목받는 셰프의 공간 몇 군데는 아예 새로운 손님 예약을 받지 않으며, 그들만의 리그로 운영된다고 들었다. 개업 때는 지인 한정으로 소프트 오프닝을 하는데, 이번 방문 손님이 다음 방문 예약을 하고 가는 식으로 몇 달 스케줄이 채워지기 때문에 새로운 방문자에게까지 기회가 가지 않는 것이다. 업장을 반쯤 스피크이지화하는 방식은 트렌드가 쉽게 쏠렸다가 빠르게 변하는 요식 업계에 유행하는 새로운 마케팅 기술 같기도 하다.

나도 브랜드 마케팅에 놀아난다고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한정판 스니커즈 드로에 참여할 때다. 되팔 때 몇 배의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슈테크 차원으로 응모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순수하게 갖고 싶어서 래플(무작위 추첨을 통해 구매 자격을 주는 방식)에 참여하는 쪽이다. 매번 처참하게 미끄러지고 기대도 거의 없지만, 사카이 컬래버레이션 베이퍼맥스나 트래비스 스콧 프라그먼트 조던 1 제품은 확률이 낮다고 응모에 참여하지 않기에는 지나치게 예쁘다. 당첨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번번이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드로 일정을 캘린더에 입력하며 알람 설정을 하는 나는 자본주의의 복잡한 지형을 오르는 산악인 같다. 다만 산이 거기 있으니까 묵묵하게 오르는 것이다.

이 치열한 희소가치 게임은 욕망이라는 에너지를 동력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누군가의 초대 없이 혈혈단신 뛰어든 개인은 번번이 ‘실패(Fail)’ 메시지와 마주한다. 게임 설계자는 인스타그램일까? 유용한 정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트렌드를 체크한다고 생각하며 팔로 목록을 늘려두지만, 가끔 실험실의 쥐처럼 외부 자극에 조건반사를 보이고 있는 것 같을 때 서늘해진다. 내가 원하는 게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 누군가 먼저 누린 모습을 봤기에 뒤따라 움직이는 건 아닐까? 적극적으로 쟁취하기에는 항상 한 발 늦었거나 자원이 부족하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을 계획해서 예약하고 소비하는 일뿐 아니라 현실에 대처하고 생산하는 활동에도 나눠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현생’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다만 내 좌절감과 패배감을 소중히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은 빈번하게 벌어진다. 가져도 그만이고 안 가져도 사는 데 지장 없는 한정판 운동화를 갖지 못해서 느끼는 실패 감각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안타깝고 속상할 때를 위해 감정을 아껴두고 싶다. 예약 없이도, 기다리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충분히 좋은 것들의 목록을 늘려보면서 힘 빼지 않고 넓은 문으로 천천히 드나들어야겠다. 스스로를 애써 지키지 않으면 반복되는 가짜 좌절감이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황선우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와 인터뷰 집 〈멋있으면 다 언니〉를썼다.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운동 애호가.

‘ELLE Voice’는 매달 여성이 바라본 세상을 여성의 목소리로 전하고자 합니다. 뮤지션 김사월 , 최지은 작가 등 각자의 명확한 시선을 가진 여성들의 글이 게재될 12월호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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