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루저가 될 권리

2021. 11.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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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loser)는 패배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일컫는 모욕적 표현으로도 종종 사용된다. 요즘 웬만하면 다들 무슨 무슨 권리를 주장해서 법조인들이 골치 아프다고 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루저가 될 권리까지 주장할 수 있을까.

칼럼 제목 ‘루저가 될 권리’는 ‘지구가 끝장나는 날’이라는 B급 감성 영화에 나오는 대사에서 따왔다(본 칼럼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음을 미리 밝힌다). 영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외계인이 조용히 와서는 사람들을 로봇으로 개조한다. 그런데 대도시로 이주해 별다른 직업 없이 ‘잉여 인간’처럼 살던 주인공이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했다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로봇으로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다. 곧 온 동네 로봇들이 주인공을 추격해오고, 결국 주인공도 붙잡혀 로봇이 될 위기에 처한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기세 등등한 주인공은 외계인에게 왜 사람들을 로봇으로 바꾸냐고 따지듯 묻는다. 외계인의 말인즉 인간은 나약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이니 우주의 순리에 더 잘 적응하는 존재로 인간을 개조하기 위해서란다.

더 효율적이고 평화로우며 이성적인 존재로 ‘무료’ 업그레이드시켜주겠다는 놀라운 제안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리고 실제 적지 않은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이미 로봇이 되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비웃으며 외계인에게 소리친다. “우리에게는 루저가 될 권리가 있다고!”(원래 영어 대사는 몹시 적나라해서 순화된 한국어 자막을 재순화했음을 밝힌다) 예기치 못한 반응에 외계인은 인간이란 존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며 허무하게 지구를 떠난다. 블록버스터 SF 영화처럼 휘날리는 성조기 아래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가는 훈남형 엘리트 영웅이 아니라, 어디를 가나 철 좀 들라고 쓴소리 듣는 가난하고 꾀죄죄한 중년남이 지구를 구했다. 외계인의 최첨단 무기에 미 공군의 F-16과 같은 ‘재래무기’로 대응하느라 대도시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몇 개를 가뿐히 박살 낸 것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보다 고등한 생명체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열등한 권리를 선포함으로써 평화가 찾아왔다.

루저가 될 권리, 설마 그런 권리가 있겠냐마는 이 표현은 사람됨의 핵심을 역설적으로 건드린다. 성취 지향적이고 과도한 경쟁이 일어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루저’라는 말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낙인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업무에 효율적이고, 실수가 없기에 인간이 될 자격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이 아니라 인간인 것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멋쩍어 서로 웃기도 하고, 반복되는 실수에 마음 아파하고, 쑥스럽지만 용서를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취와 업적이 삶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곳에서는 생산성과 효율성이 사람됨의 가치와 혼동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능력주의 사회에서 더욱 필요한 덕목은 타자를 나의 사적인 욕망 혹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기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주시(注視)를 윤리의 핵심으로 삼았던 영국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은 “사랑은 자신 이외에 다른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루저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잉여 인간이란 없다. 물론 자기중심적 성향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 같은 이타적인 시선으로 타자를 보려면 자기를 부정하는 아픔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여러 이유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고, 삶의 고됨이 특정 계층이나 세대에 가중될수록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고통스러움을 감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은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때 존중되고, 또한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기 때문이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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