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원폭 76년, 살아남았어도 늘 공포였다"

이영희 2021. 11. 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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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피폭자 권순금씨가 암으로 떠난 남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펑’ 하고 엄청난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온통 새까만 구름이더라고. 처음엔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원자폭탄이라고….”

권순금(95)씨는 인터뷰 중 ‘까맣던 하늘’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말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을 당시 충격은 트라우마로 선명히 남아 있다. 당시 원폭 투하 지점에서 1.8㎞ 떨어진 집에 있다가 피폭된 권씨는 현재 생존한 거의 유일한 한국인 피해자다. 6일 열린 ‘한국인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을 하루 앞두고 그는 나가사키 자택에서 한국 언론과 만났다.

당시 500m 상공에서 폭발한 나가사키 원폭으로 약 7만4000명이 사망했다. 이 중 1만 명가량이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한반도 출신 노동자 등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부터 현지 한인들을 중심으로 위령비 설립이 논의됐지만, 장소와 비용 문제, 나가사키시 측과 견해 차 등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2013년 발족한 위령비건립위원회가 시 측과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6일 오전 나가사키시 평화공원 안에서 제막식과 함께 위령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6일 제막 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연합뉴스]

권씨에 따르면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시에는 조선인 약 7만명이 있었다. 이 중 2만여 명이 피폭해 1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노동자도 많았다. 자신을 포함해 살아남은 피폭자들도 ‘언제 증상이 나올까’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고 권씨는 전했다. 권씨의 남편인 조연식 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 지방본부 단장도 1971년부터 몸 상태가 안 좋아졌고, 83년 암으로 별세했다. 192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온 권씨는 63년부터 나가사키시에서 ‘아리랑정’이라는 고깃집을 운영했다. 뒤늦게나마 위령비가 세워진 데 대해 그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고 말했다.

6일 제막식에는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와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 무카이야 마무네코(向山宗子) 나가사키시의회 공명당 대표 등이 참석했다. 또 일본 고등학생 평화사절단 등 100여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높이 3m의 기단은 거북 모양이며, 비석 뒤편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희생자 영령을 기리는 추도문이 새겨졌다. 위령비 아래쪽에는 징용 피해자들 상황을 설명한 안내문이 적혔다. 나가사키시 반대로 ‘강제징용’ 대신 ‘본인의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을 새겼다.

나가사키=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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