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루트] 조선 백자 '자기소(瓷器所)'와 '도공(陶工)'

라영철 2021. 11. 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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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뛰어난 장인(匠人) 사옹원 편입.. 사기장 제도 정착
분업과 협업, 생산성·기술 향상.. 번조관 파견, 창의 걸림돌
분원 자기소, 원료 산지 따라 이동하다 現 분원리 정착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경기도 광주시는 도자 문화를 기반한 경제 활력과 부가가치를 높일 경쟁력으로 조선시대 관영 사기 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인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꼽았다.

신동헌 광주시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광주가 조선 왕실 백자(白瓷)의 고장이며, 도자 메카로서 지금도 도공들이 옛 명성을 잇기 위해 혼을 담아 작품에 매진한다"라고 자부했다.

경기도사 자료에 따르면,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된 시기는 역사 연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상한 연대를 대략 1430년대 또는 1460년대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분원에서 만드는 자기는 왕실 자기와 국가 행사에 필요한 그릇 등 관어용(官御用)으로 쓰여 개인이 소유하거나 매매할 수 없었다.

본지는 경기 광주에 도자기 제조장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과 이유, 그리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 분원 설치

② 자기소(瓷器所)와 도공(陶工)

③ 자기소의 위기와 도공의 비애(悲哀)

■ 조선 최고의 분원 도공(陶工)

곤지암도자공원 [광주시]

경기도 자료에 따르면, 분원 자기소에서 자기를 구워 만드는 작업은 관아 소속·지정된 전국의 사기장들이 일정 기간을 정해 차례대로 돌아가며 일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겨울 2~3개월을 제외하고는 한 번 작업에 투입되면 시기에 따라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동안 일했다.

분원에서는 실력이 뛰어난 지방 장인을 뽑아 사옹원 소속으로 뒀다. 이는 중앙과 지방의 자기 품질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이었다. 왕실과 관청용 백자의 품질과 장식 기법은 뛰어났지만, 지방에서 생산하는 자기의 품질은 낮은 수준이었다. 중앙과 지방의 기술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면서 18세기를 전후해 분원 소속 사기장 제도가 정착돼갔다.

이후 분원 자기소에서 일하는 자기 제조 기술자들은 고정해서 작업하게 했고, 그 외는 작업에서 제외되는 대신 세금으로 포(布)를 바치도록 했다. 우수한 기술자를 상시로 일하게 해 양질의 도자기를 확보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분원 소속 기술자들은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도공(陶工)으로 인정됐다.

이들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전업적인 수공업자로 고정 급여를 받는 장인(匠人)이었다.

■ 자기소(瓷器所)의 분업과 협업

분원 백자 자료관 [광주시]

분원 자기소에서는 철저한 분업 체계로 도자기를 생산했다. 각각의 작업 공정마다 숙련공이 배치돼 이들의 주도로 작업을 처리해나갔다. 채취한 백토를 섬세하고 연하게 만드는 작업, 그릇을 빚는 물레 작업, 유약을 입히는 작업, 가마 작업 등의 단계로 공정을 구분했다.

분업과 협업은 생산성을 높이고 기술 향상을 이뤄냈다. 하지만 분원 소속 장인(匠人)들은 조정에서 정한 제작 규범을 엄격히 준수해야 했다. 원료에서 형태와 문양, 색채에 이르기까지 늘 조정의 통제를 받았다. 이를 위해 사옹원은 번조관(관리 감독관)을 파견해 자기 제작의 전 과정을 감독했다.

이런 체제는 규격에 맞는 품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데는 적합했지만, 장인(匠人)들이 창의성을 발휘해 다양한 자기를 만드는 데는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자기 제조 기술자들이 한 해 동안 분원에서 만들어야 하는 자기의 양은 왕실 행사에 쓰이는 특수 자기를 제외하고도 통상 1300죽(1죽은 10개)에서 1370죽 규모였다.

그들은 1년에 두 번의 정기적인 진상 자기 외에도 중앙 각 기관에서 요구하는 적지 않은 양의 도자기를 만들어야 했다. 생산한 자기는 한강의 수로를 통해 왕실과 중앙 관청에 상납했다.

■ 분원 자기소(瓷器所)의 정착

분원 자기소는 한 곳에 고정해 있지 않고 대체로 10년 주기로 광주 지역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설치와 폐쇄를 반복했다. 나무가 많은 여러 곳의 산지를 가마 작업에 필요한 땔나무 조달 지역으로 정하고 자기소를 옮겼다. 그곳에서 땔나무 공급이 어려워지면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

우장척이 사옹원 관원과 도제조의 의견에 따라 임금에게 보고 문서를 올렸다. "지금 분원이 설치된 곳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곳에 번소燔所(자기소)를 설치하기 적당한 곳이 있으니, 탑립동이라 합니다. 산을 뒤로하고 있으며, 앞에는 물이 있어 사람이 거처할 만하고 버려둔 땅이라 설치에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 분원 사람들의 민심도 이곳으로 옮기길 원합니다." - 『승정원일기』 256책, 숙종 2년(1676) 8월 28일

당시 광주의 6개 면(面) 산지가 분원 자리로 이용됐다. 그런데 분원을 설치했던 곳을 화전민들이 밭으로 개간하면서 울창한 나무 숲을 다시 조성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렇다고 화전민들을 무작정 내쫓을 수는 없었다. 부담을 느낀 조정은 고심 끝에 분원 자기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장기적 대책으로 화전민에게 개간을 허락하되 세금 명목으로 땔나무를 바치게 했다.

일각에선 아예 분원 자기소를 한 곳에 고정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늘어나는 자기 수요를 맞춰야 하는 데다 잦은 분원 자기소를 옮기는 데 드는 비용과 번잡함이 이유였다. 분원 고정론이 제기된 결정적인 이유는 화전민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분원 운영의 효율성에 비중이 더 컸다.

하지만, 분원 자기소는 곧바로 한 지역에 고정되지 못한 채 한동안 광주 지역 여러 곳으로 옮겼다. 그러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남종면 분원리에 고정돼 자리 잡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수공업 제조장이 판매 시장이나 교통 여건보다는 원료 산지를 따라 다니다 보니 이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시설은 임시적이었고 그 규모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당시 수공업 발전을 저해하는 큰 걸림돌이었다.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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