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와 한국의 연금정치

2021. 11. 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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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한국연금학회장·리셋 코리아 연금개혁분과장

오랜 지인인 핀란드 연금센터 이즈모(Ismo Risku) 실장이 필자에게 자주 물어보는 말이 있다. “출산율이 낮아 연금제도가 지속 불가능해 보이는데,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작년 한·중·일 연금전문가 세미나 발표자였던 일본 관리가 필자에게 질문한 내용이다. “훨씬 적게 부담하면서 한국은 어떻게 일본보다 더 많은 액수의 연금을 지급할 수 있는가?”

“고령화라는 초고속 열차에 탑승하고 있는 한국.” 최근 한국연금학회와 핀란드 연금센터가 공동 개최한 심포지엄 토론자였던 미카(Mika Vidlund) 해외협력 담당관의 첫 일성이었다. “출산율을 1.0으로 가정하면 장기적으로 핀란드 연금보험료는 37%로 전망된다.” 핀란드 연금센터 미코(Mikko Kautto) 의장 발언이다.

「 엇비슷한 핀란드 보험료는 24.4%
우리는 9%만 내면서 적자 눈덩이
대선 후보들 연금개혁 공약 실종
연금문제, 탈 정치화해 해결해야

최근 들어 출산율이 급락해 1.4 수준인 핀란드는 출산율 1.0을 가정하여 연금재정 추계를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출산율이 1.7 수준이어서 그렇다. 미코 의장이 1.0 가정의 전망치를 보여 준 이유는 한국연금학회의 특별 요청이 있어서였다. 참고로 출산율이 2.1이어야 현재 인구 수를 유지할 수 있다.

한국에서 흔한 논쟁 하나가 한 달 후의 일도 모르는데, 어떻게 70년 뒤의 일을 전망하느냐는 거다. 정부 연금재정 추계를 못 믿겠다는 주요 논거 중의 하나다. 연금 문제의 심각성을 과대 포장하는 ‘공포 마케팅’ 수단이라고도 비판한다.

지난해 한국 출산율이 0.84임을 들어 유사한 가정을 적용한 핀란드 전망치를 보여 줄 수 있겠냐고 필자가 핀란드 측에 요청한 배경이다. 0.8대로 추산한 결과를 보여주기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어떻게 출산율이 0.8대까지 떨어질 수 있겠냐고 의아해했기 때문이었다. 미코 의장 지시로 핀란드 연금센터에서 특별작업한 수치가 보험료 37%이다. 장기적으로 우리와 유사한 수준의 연금을 지급할 핀란드의 현재 보험료는 24.4%다. 20년 이상 9% 보험료를 내 온 우리와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매일 정신없이 쏟아지는 유력 대선주자의 공약 중에 연금개혁 공약은 실종상태다. 득표에 도움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 심각성을 잘 아는 관료 역시 눈치만 보고 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매일 4000억원 이상의 부채가 쌓이고 있는 한국의 연금, 문제 제기하는 집단이 거의 없다. 내가 사는 동안 별일 있겠어? 연금 줄 돈 없으면 세금 더 걷으면 되지. 발등에 떨어진 불도 아닌 데 천천히 개혁하면 되지. 자기 합리화 일색이다.

2020년 한 해에만 100조원 넘게 국가부채를 늘린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2088년까지 1경 7천조원의 누적적자가 쌓일 국민연금 역시 문제없다고 한다. 100년 뒤인 2120년에 가서도 연금 줄 돈이 있는 일본 사례는 모른척하면서 말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연금부채에 대한 경제부총리의 발언과 인사혁신처, 복지부 보도자료를 보면 정녕 우리가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실감 나지 않는다. 크게 걱정할 일 아니라는 답변 일색이라서 그렇다.

그 좋은 머리를 나라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이익 지키기 위해 쓰고 있다. 개혁이 지연되면 평생 그만큼 연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자신들 이익을 지켰다는 공로로 승승장구한 일부 관리는 부끄러움조차 못 느끼는 것 같다. 특정 정권에 편향된 정보를 제공하는 폴리페서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15년 전 “국민연금의 잠재 부채가 하루에 800억원씩으로, 머리 위에서 시한폭탄이 돌아가는 느낌”이라던 당시 복지부장관의 발언이 귓등을 때린다.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가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등골을 빼먹을 연금에는 손 하나 대지 않으면서도, 복지지출을 확대하겠다만 하고 있다. “염치상실 시대에 살고 있다”는 기획재정부 관리의 한탄이 가슴에 맴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UN ESCAP 보고서는 대중이 좋아해도 그 제도가 지속 불가능하면 포퓰리즘 정책이라 규정한다. 포퓰리스트 전성시대에서 어떻게 하면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일수록 정공법을 택해야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 같다.

대선 후보들이 이슈화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과 직접 토론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가감없이 보여주는 방안을 제안한다. 정치적·이념적으로 중립적인 전문가 패널의 날 선 질문에 답변하는 대선 후보들을 통해 우리가 처한 민낯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 상황을 대선 후보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으며, 어떠한 대책을 준비하고 있는 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연금 문제에 대해서만은 ‘탈정치화한 접근’을 하자는 대선 후보들의 결의라도 이끌어낼 수 있다면 큰 수확일 것 같다. 대선 후보 한 사람이 연금개혁 총대를 매는 것이 아닌, 정치권 전체에 부담이 분산될 수 있어 좀 더 적극적인 문제 제기가 가능할 것 같아서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한국연금학회 회장·리셋코리아 연금분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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