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축적된 곳, 춤으로 말을 걸고 질문을 하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국내 무용계에서 일어난 변화 중 두드러진 것은 댄스 필름(Dance film)에 대한 폭발적 관심과 제작 증가다. 댄스 필름은 직역하면 ‘무용 영화’지만 대체로 무용 소재 극영화나 무용 공연 영상을 제외하고 영상 매체에서만 가능한 표현을 보여주는 무용이 담긴 작품을 가리킨다.
댄스 필름은 1940년대 등장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예술 형태로 인정돼 영화제와 TV 등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국내에선 프랑스와 미국에서 작업하던 김현옥 전 계명대 교수가 1990년대 초반 귀국하며 소개했지만, 무용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영상문화와 테크놀로지의 빠른 발달에 발맞춰 2000년대 말부터 국내에서도 영상에 관심을 갖는 젊은 안무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안무가들이 너도나도 댄스 필름을 제작하는 계기가 됐다.
송주원(48)은 최근 댄스 필름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작업하는 안무가로 손꼽힌다. 변형되고 사라지는 도시 속 공간에서 춤으로 말을 걸고 질문하는 도시공간무용 프로젝트 ‘풍정.각’(風情.刻)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이다. 무엇이 그를 블랙박스 극장에서 밖으로 내보내 카메라를 향하게 했을까. 지난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4층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만난 송주원은 ‘공간의 맛’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제는 저를 안무가이자 댄스 필름 감독 그리고 영상 아티스트라고 소개하는데요. 제가 영화를 좋아하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해 왔지만, 영상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14년부터입니다. 처음부터 댄스 필름에 대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공연장 바깥에서 하는 장소특정적 무용 공연을 만들고 영상에 담으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됐습니다.”
한양대 무용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를 졸업한 송주원에게 20대는 좋은 무용수가 되기 위해, 30대는 좋은 안무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시기였다. 한양대 동문 무용단인 밀물현대무용단에서 활동한 그는 1997년 아르코 소극장에 ‘가고 싶지 않았어’를 올리며 안무가로 데뷔했다. 이후 무용수로서 국내 안무가 안은미 장은정 등과 해외 안무가 조엘 부비에, 자비에르 르로이 등의 작업에 참여했다. 특히 2004년에는 일일댄스프로젝트를 창단해 안무가로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무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극장 공연과 그 리허설을 하기 위한 예산이 늘 부족했다. 고민하던 그의 눈에 띈 것이 도시 곳곳에서 시간의 흔적을 품은 장소들이었다.
“제가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걷다 보면 공연하고 싶은 장소가 눈에 띕니다. 결정적으로 제게 극장 밖으로 나가는 계기가 됐던 것은 2013년 국립현대무용단에서 개최한 국내 안무가 초청공연이었어요. 당시 ‘환.각’(幻.刻)이란 작품을 올렸습니다. 그때 여러 좋은 제작여건에도 불구하고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무대 밖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더 리얼한 삶의 장소에서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2014년 전통 한옥으로 된 서울 북촌문화센터에서 공연을 올릴 기회가 송주원에게 찾아 왔다. 대표작인 ‘풍정.각’ 시리즈의 시작이다. 그는 “장소특정적 공연을 기록하는 동시에 관객에게 현장에서 못 본 뷰(장면)를 보여주고 싶어 영상을 찍었다”며 “‘풍정.각’ 시리즈의 3편까지는 사실상 공연 기록이고 4편부터가 댄스 필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풍정.각’이란 제목에서 풍(風)은 알 수 없는 삶의 좌표와 같은 것, 정(情)은 그 안에 새겨져 있는 감정, 각(刻)은 그 찰나의 기록을 뜻한다. 송주원이 영상 작업을 처음 시작할 당시의 고민과 그에 따른 질문에서 만든 제목이다. ‘풍정.각’ 시리즈는 현재 15편까지 나와 있는데, 각 편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본격적인 댄스 필름의 시작인 4편(2015년)은 ‘골목낭독회’라는 부제를 달았다. 서촌 갤러리 팩토리에서 영상 전시와 퍼포먼스를 함께 진행하는 방식으로 발표된 이 작품은 통의동과 옥인동의 재개발 지역 골목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풍정.각’ 시리즈는 이 밖에도 낙원상가, 세운상가, 장한평 등 주로 개발에서 밀려나 쇠락한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저는 시간이 축적된 장소를 좋아합니다. 그런 곳일수록 그곳에 투영된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제 작품에서 ‘장소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장소에 따라 무용수의 신체가 다르게 작동하고, 관객의 경험과 해석이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작품을 구상하면 우선 무용수들과 여러 차례 해당 공간을 방문해 장소성을 몸에 체화시킵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풍정.각’ 시리즈 외에도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사자다’ 등 여러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의 작품들은 LA댄스카메라웨스트, 런던스크린댄스페스티벌,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상영됐으며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작품상(2017년)과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관객상(2018년), 천안춤영화제 우수상(2018년), 이탈리아 국제 푸오리포마토 현대무용&댄스필름 페스티벌 관객상(2021년)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서울미술관 등에서 퍼포먼스와 영상 전시 형태로 꾸준히 공개되고 있다.
“국내에는 (2017년에야 서울무용영화제가 생길 정도로) 댄스 필름을 상영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로 해외 댄스 필름 영화제에 출품했습니다. 거기서 상을 받고 다른 댄스 필름 영화제에 상영될 기회를 얻기도 했고요. 2018년 제 작품을 본 한 영화감독님이 일반 영화제에도 출품하라고 권유해서 국내외 영화제에도 출품하고 있습니다.”
안무가이자 댄스 필름 감독인 그는 최근 영상 아티스트로서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하는 국내 최대 공예축제인 ‘공예주간’과 대림문화재단의 디뮤지엄은 지난해 그에게 각각 축제 행사와 전시를 소개하는 영상을 의뢰했다. 안무가 출신인 그가 만드는 영상이 감각적이고 섬세하기 때문이다.
요즘 무용계에선 너도나도 댄스 필름을 찍는다. 이 때문에 촬영비가 늘어나 예전보다 작업하기 힘들어졌다는 게 그의 푸념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천천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온 사람다운 여유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그동안 제 작업을 중심으로 댄스 필름을 찍었다면 앞으로는 카메라로 젊은 안무가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싶다”며 “60살쯤 되면 다른 안무가들의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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