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 저격당한 작가가 반박 대신 택한 것
'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김예지 기자]
대한민국 여성 댄스 크루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큰 화제를 모은 엠넷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아래 스우파)가 26일 '홀리뱅' 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스타에 가려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지만, 보석처럼 빛나고 있던 여성 댄서들을 발굴해 조명한 이 프로그램에 나도 어느샌가 '덕통사고'(덕질+교통사고)를 당해버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화를 앞두고 "희한하게도, 스우파 우승팀이 어디일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엔터미디어> 박생강 칼럼 제목 인용). 더이상 이 멋진 배틀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더 크기도 했고, 이미 저마다 충분히 멋있고 매력적인 이들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는 게 별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라치카' 팀의 리더 가비의 말처럼, "누구를 찍어 눌러야 하고,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무대를 보며 '멋있다'고 적의 없는 감탄사를 내뱉던 댄서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대개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그러하듯 스우파에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장면이 많았지만, 다정함이 새어 나오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사심을 담아) 복기하고 싶은 장면이 하나 있다. 세미 파이널 경연을 마치고 '프라우드먼' 팀의 최종 탈락이 확정된 후 리더인 모니카가 소감을 말하던 모습이다. 울먹이며 응원해준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던 그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저는 오늘 집에 가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돌아가고, 제 본업으로 돌아가서 저를 지금까지 만들어줬던 사람들한테 다 그 덕을 돌려주며 살아갈 거예요. 저 위로 안 해주셔도 되고, 계속 같이 춤췄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는 배틀도, 정말 멋있는 모습 보여주세요. 감사합니다."
'인생에 이런 일이 다시 생길까' 싶을 정도로 꿈만 같던 무대를 뒤로하고 도전을 끝맺어야 하는 순간. 파이널 무대를 위해 팀원들과 쉴 새 없이 달려온 만큼 '더 많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탈락해서 속상하다'는 아쉬움을 토로할 법도 한데, 모니카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소감에서 자신이 아닌 '지금껏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과 '여전히 이 무대에 남아 춤을 출 동료들'을 언급했다.
팀의 이름처럼 마지막까지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에게서, 나는 그 누구보다 다정한 마음을 읽었다. '대선배'의 탈락으로 대신 속상해하고 마음을 쓸 이들을 오히려 다독여주는, 사려 깊고 세심한 마음 말이다.
흔히 '다정한 사람'이라고 하면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이들을 떠올린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겉보기에 무뚝뚝하고 차갑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 몫의 감정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을 나는 '다정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모니카는 단단하면서 동시에 다정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유독 마음이 간다.
▲ 김혼비 <다정소감> |
ⓒ 안온 |
김혼비 작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전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통해 유쾌하고 따스한 시선을 보여줬던 그가, 이번엔 새로운 산문집을 펴냈다. 제목은 <다정소감>.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산문집은, 지금의 김혼비를 만든 따스한 시간들, 호의와 연대의 흔적이 촘촘히 기록돼 있는 비밀 일기장 같은 책이다.
'다정'을 주제로 한 산문집이라니. 미담이야 좋지만, 그저 그런 뻔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 예상과 달리, 김혼비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그리 '뻔하지' 않다. 작가 스스로가 에필로그에 밝힌 말처럼, "뻔하다면 뻔한 패턴의 이 이야기들은 결코 뻔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유했다. 뻔한 다정이란 없었다."(p. 219)
'그의 SNS를 보았다'라는 제목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어느 날, 김혼비 작가가 좋아하던 뮤지션이 SNS를 시작한다. 문제는, 올리는 게시물마다 맞춤법이 엉망진창이라는 것. 팬심을 '시험'하는 듯한 그 글들을 보다 못한 김 작가는 자신의 SNS에 이 같은 고충을 털어놓은 글을 올린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들로 그의 인생 타임라인을 대충 그려봐도 그는 평생 음악할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생계를 위해 돈 버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들은 그에게 결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의 맞춤법에 얼마나 지배적인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해볼 상상력이 아예 없었다. 그날 나는 그동안 내가 기본 소양이라고 여겨왔던 것들, 사회가 기본 소양이라고 설정해놓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가져다 써왔던 일들에 관해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때로 무심코 지워버리는 것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p.102)
누군가는 이 에피소드가 왜 '다정'이라는 주제로 묶이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가장 '김혼비다운' 다정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정하고, 내가 미처 상상해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사려깊게 돌아보는 것.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고, 그를 위해 부단히 내 태도를 가다듬는 것. 이런 삶의 자세 또한 '다정'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면, 정말 우리의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른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솔직히 그날의 맛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건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는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 무너져 있던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한 입 두 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p.210)
글을 읽다 보면 속절없이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따뜻한 기억들이 잔뜩 담겨 있다. 22개의 이야기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조금 유치한 다짐을 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박준 시인은 이 책의 추천사를 쓰며 이렇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작가의 다정은 작가의 다감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정을 느껴본 사람은 다정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니까." 김혼비 작가의 다감이, 그리고 그 다정이 더 많은 이들에게 스며들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이 책이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처럼, '한 시절을 건널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힘을 또다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길 바란다. 모든 다정한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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